여수·울산 난항, 대산 가시화…정부, “연말이 골든타임, 진정성 의구심”

지난 8월 정부와 석유화학업계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챔버라운지에서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산업부
지난 8월 정부와 석유화학업계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챔버라운지에서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산업부

[시사포커스 / 강민 기자] 정부와 석유화학업계가 지난 8월 연말까지 구조조정안을 마련하기로 자율협약을 맺었지만, 마감이 두 달도 남지 않은 현재까지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대형 산업단지의 경우 파이프라인·전력 등 기반시설을 공유해 한 기업의 감산이 다른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다보니, 업체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논의 속도가 더디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협약 이후 ‘선 자구 노력, 후 지원’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자체 감축이나 구조조정에 나서는 기업에는 금융·세제·R&D(연구개발)를 연계한 지원을 제공하되, 참여없이 혜택만 기대하는 기업은 정부 지원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일 산업경쟁력 관계장관회의에서 “일부 산단과 기업 사업재편이 여전히 지지부진해 업계 진정성에 대한 시장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모든 산단과 업계가 속도전을 펼쳐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업계가 연말까지 골든타임을 허비한다면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도 조력자로 남기는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수·대산·울산 등 주요 산단에서 기업 간 물밑 협상이 이어지고 있으나, 충남 대산을 제외하면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문신학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지난 3일 간담회에서 “대산 석화단지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이 초안을 제출했고 연말까지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산 산단에서는 롯데케미칼이 NCC(나프타분해시설)를 현물로 출자하고, HD현대케미칼이 현금을 투입해 합작사를 설립한 뒤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세부 조정은 두 회사가 지속 협의 중이다. 롯데케미칼은 실적 발표에서 “국내 2개 크래커가 여수와 대산으로 분리돼 있어 전체 효율을 내기 한계가 있었는데 같은 대산 내에서 기초유분 생산량을 조정하고, 필요시 한시적으로 크래커를 셧다운하는 시나리오를 통해 손실 수준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내부 결과가 있다”며 “시황이 어려울수록 통합 효과가 커져 현재 손실을 줄이는 데 충분한 시너지가 존재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국내 최대 규모인 여수 산단에서는 LG화학과 GS칼텍스가 NCC 매각과 합작사 통합 운ㅇ녕 방안을 두고 지속 논의 중이지만, 설비 가치 평가와 통합 이후 경영권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 산단에서는 SK지오센트릭·대한유화·에쓰오일이 9월 사업재편을 위한 업무협약(LOI)을 체결하고, 외부 컨설팅에 재편 전략 자문을 받기로 했다. 다만 합작이나 설비 중단 등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데, 각사가 보유 설비의 경쟁력을 강조하며 셈법이 서로 다른 상황이다. SK지오센트릭은 SK에너지와의 수직계열화를 기반으로 한 원료 조달 이점을, 대한유화는 생산능력을, 에쓰오일은 샤힌 프로젝트를 내세우고 있다. 특히 샤힌 프로젝트를 재편 논의에 포함할지 여부가 울산 협상의 핵심 변수로 거론된다.

최근 일부 기업의 실적이 개선되면서 구조조정 동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롯데케미칼 3분기 영업이익은 1325억 원으로, 작년 3분기 4174억 원 영업손실에서 흑자로 전환했다. LG화학의 3분기 영업이익은 6797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38.9% 증가했고 금호석유화학은 3분기 영업이익 844억 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29.7% 증가했다. 이에 업계에 “경쟁력 강화 구조조정이 실적 반등에 묻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확정한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도 부담이다. 산업계 요구보다 높은 수준의 탄소 감축목표가 더해지면서, 감축 의무 강화로 배출권 구매 비용이 늘어나 기업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대한상의는 정유·석유화학·철강 등 18개 기업이 내년부터 2030년까지 부담해야 할 배출권 구매액이 약 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업계 관계자는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각 기업이 연말까지 계획을 제출하긴 하겠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안이 나올지는 미지수”라며 “정부도 기간 연장 등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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