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 위만조선의 멸망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현재도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의 멸망을 ‘고조선이 망했다’고 표현

3대 87년만에 패망한 위만정권은 한(漢)의 괴뢰정권이므로 한국사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고조선은 B.C.238년 북부여로 왕통이 계승되었다...B.C.108년 위만정권의 멸망과는 무관

위만조선의 위치는 평양 대동강이 아니라 요서 난하유역에 있었다...윤내현 학설

 

우리 독서계에 위험한 책이 있다. 한때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우리나라 수험생들에게 인기있는 책이었다. 출판사는 호황을 누렸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인기있는 만큼 한국사의 불행이었다. 식민사관의 바이러스가 한국사회 곳곳에 침투했다. 최근에 나온 “시민의 한국사”도 위험한 책으로 보인다. 문 前대통령이 추천까지 했지만, 책 안에 있는 독소를 알고 추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시민의 한국사”(2022)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도 모른다면서 고조선의 멸망연대는 ‘기원전 108년’이라고 적고 있다. 이병도의 “국사 대관”(1956)이나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1999)에도 위만의 멸망연대로 ‘기원전 108년’을 기록하고 있고, 이기백은 위만이 왕이 된 때를 ‘기원전 194년’이라 했다. 두 이씨는 공통적으로 고조선의 건국연대 B.C.2333년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위만조선의 위치도 평양 대동강 주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전 문헌상 위만이 현재의 평양에 왔다는 근거가 없다. 한국에서는 자기 역사를 부정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병도는 위만조선이 평양 대동강에 있었다고 주장해 우리 국사를 망쳐놓았다(왼쪽 출전, 국사대관). 반면에 윤내현은 위만조선이 요서의 난하유역에 있었다고 새롭게 밝혀 고대사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오른쪽 출전, 한국고대사). (사진 / 이찬구 기자 스캔, 적색글씨는 필자의 편집임)
이병도는 위만조선이 평양 대동강에 있었다고 주장해 우리 국사를 망쳐놓았다(왼쪽 출전, 국사대관). 반면에 윤내현은 위만조선이 요서의 난하유역에 있었다고 새롭게 밝혀 고대사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오른쪽 출전, 한국고대사). (사진 / 이찬구 기자 스캔, 적색글씨는 필자의 편집임)

위만조선의 멸망을 곧 고조선의 멸망으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반역

더 큰 문제는 위만의 멸망을 곧 고조선의 멸망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충격적인 역사 왜곡이며, 한국사의 반역이다. 70명의 대학교수들이 함께 쓴 “시민의 한국사”는 “고조선의 대신인 성기(成己)가 주민들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抗戰)했지만, 기원전 108년에 끝내 (위만) 도성인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고조선은 멸망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08년에 3대 87년만에 망한 것은 위만조선이지, 고조선이 아니다. 마치 위만이 고조선을 대표해서 전쟁한 것처럼 한(漢)과의 전쟁을 항전(抗戰)이라는 말로 미화하며, 위만에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위만은 어쩌다 한국사의 변방에서 일어난 87년 노략질의 기록일 뿐이다.

그런데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에서 “위만조선은 비록 철기문화에 보다 친숙한 중국인 유망민의 세력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인의 식민정권일 수는 없다. 오히려 고조선인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연맹왕국적인 정권이었다”고 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중앙정부를 위만이 완전히 접수하였고, 고조선을 대표하는 연맹왕국적인 정권이 곧 위만정권인 것으로 과대 평가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위만이 중국의 식민정권이 아니라는 항변이 필요했다. 억지를 부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위만의 멸망이 곧 고조선의 멸망으로 곡해되는 단초가 제공되었다. 매우 잘못된 한국사의 중대한 오류라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이병도는 “국사 대관”(1956)에서 조그마한 조선이 약 1년간이나 한(漢)의 대공세에 완강히 저항한 것은 당시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왕성한 결과요, “비록 민족의 일부요, 지리적으로는 반도 북부에 불과하지만, 일국(一國)을 들어 이민족(異民族)의 통치하에 놓인 것은 이것이 첫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한반도 북부에 있던 위만이 한(漢)에 멸망 당하여 우리 민족이 이민족의 첫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였다. 이는 나라의 주권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해주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우리 교과서에서 위만조선의 멸망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2차 교육과정 때로 보인다. 1차 때는 없었고, 3차 때는 노골화되었고, 현행 교과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위만조선의 위치도 이병도와 같은 기존 학설에 따라 평양 대동강 주변으로 보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겠다.

1960년대부터 B.C. 108년 위만의 멸망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서술한 국사교과서들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위씨의 왕실(王室)을 교란케 하여 그틈을 타서 들이침에 위씨는 망하고, 무제는 이 땅을 나누어 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菟)⋅낙랑(樂浪)의 4군(郡)을 두게 되었다 한다.(1차 교육과정, 1950년대)

△위만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흡수하고 패권을 누리게 되었다. 중국 지배의 토대를 굳건히 한 한(漢)은 동방 진출의 야심을 품고 수륙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우거왕은 1년간이나 사력을 다하여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패하니 고조선의 국운이 끝이 났다. (2차 교육과정, 교학사, 1968년)

△한(漢)은 고조선이 자기네들의 무역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동방 침략 기지인 요동 지역을 위협하였으므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간이나 싸우다가, 왕검성(평양)이 함락되면서 망하고 말았다(B.C. 108).(3차 교육과정, 1970년대)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건너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계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국의 한(漢)이 고조선을 침략하자 고조선은 항쟁 끝에 멸망하였다 (기원전 108). (2020년 판 비상, 현행 교과서)

이상을 통해 우리는 해방 이후 80년이 다 되어가도록 위만조선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연대도 모른다는 사람들이 고조선의 멸망연대는 ‘기원전 108년’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거짓이다. 고조선의 멸망이 아니라 단지 위만정권의 몰락일 뿐이다. 위만의 손자였던 우거왕이 한(漢)에 패망한 것이다. 3대 87년만에 패망한 것이다. 우거왕은 고조선 사람도 아니고, 고조선의 국왕은 더더욱 아니다. 그 위만조선의 위치도 평양 대동강이 아니고 요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고조선이 임명한 국왕이 아니다

이제부터 위만과 위만조선에 대한 인식의 오류 세 가지를 요약해서 들어보겠다.

첫째, 위만은 조선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가짜 조선사람일 뿐이다. 위만이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된 것은 고조선 왕으로 등극한 것이 아니었다. 위만 스스로 반역을 도모해 왕이 되었을 뿐이다. 위만은 본래부터 연나라 사람이었지 고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강도정권이었다.

위만을 조선인계통의 사람으로 우긴 것은 “국사 대관”의 이병도이다. “사기”에 연인(燕人)이라 하였으나, 입국할 때, “椎結(추결), 蠻夷服(만이복): 상투를 짜고 조선옷을 입었다”는 이유와 위만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점을 이유로 들어 조선사람이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위만이 사용한 ‘조선’은 국호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지명’으로서의 조선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나, 만약 위만이 조선이라는 신성한 국호를 참칭하였다면, 당시 조선인들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위만을 연(燕)의 망명자이고, 요동태수의 외신(外臣)이라고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위만정권은 형식상 한(漢)의 괴뢰정권이며 식민정권이다. 그 근거로 문정창은 “한(漢)의 외번(外蕃:중국의 바깥 속국)이 된 것, 이(夷)가 한의 변경을 침노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한(漢)이 위만을 승인했다고 했다.

둘째, 위만이 속임수를 써서 위장 망명하여 도읍한 곳은 요동 험독현이다. 험독현은 창려(昌黎)현에 있었다. 평양 대동강이 아니라, 난하유역의 기씨(箕氏,奇氏)집성촌이 있었던 지역의 작은 도읍지 왕험성이었다. 이 왕험성은 고조선의 중앙수도인 왕검성이 아니다, 서쪽 변방의 작은 도읍지이며, 번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난하유역으로 들어가면 당산(唐山) 부근까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문정창은 번조선의 본래 세력권을 상곡, 어양, 우북평 등으로 보았고, 단재 신채호는 번조선의 왕검성을 요동의 개평부근으로 보았다.

“사기열전”에 의하면 위만이 요동의 요새를 빠져나와 패수를 건너왔다고 했다. 이때의 패수는 북경의 동쪽과 당산의 서쪽을 흐르는 조백하(潮白河 또는 沽水)라고 본다. 윤내현도 번한(番汗)현의 패수는 난하(灤河)이거나 난하의 서쪽에 있다고 보았다. 조백하는 난하의 서쪽에 있다. 그러니까 이곳의 패수는 도저히 대동강이 될 수가 없다. 고조선의 서쪽 변방에 몰려와 살던 토착 조선인이나 중국계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기자의 후손 중에 어느 기(箕)씨가 기자라는 배경을 무기로 삼고 고조선(북부여) 왕실의 도움을 받아 지방의 왕으로 즉위한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만이 쳐들어 왔을 때, 이 지역 조선의 왕은 준왕(準王) 즉 기준(箕準)왕이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의 유일한 조선나라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기준(箕準)의 조선인 “기준조선”만이 있을 뿐이지 위만조선이 결코 아니다. 기준조선의 강역은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번조선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조선열전’에서 ‘기준조선’을 말하지 않고 악의적으로 위만조선만을 말했을 뿐이며, 위만조선으로 고조선을 역사에서 덮으려 했다. 여기에 사마천이 ‘조선열전’을 집필한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다.

요서의 난하유역에는 위만조선이 아니라 본래 기준의 조선이 있었다

처음에 위만에게 고조선 서쪽 땅 100리를 주었다는 준왕(準王, 箕準王)은 고조선의 번조선의 왕이었지, 중앙정부의 단군 왕이 아니었다. 준왕의 부왕(父王)인 기비(箕丕)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측면 못지않게 북부여 해모수와 종실이었기 때문에 해모수를 도와 B.C.239년 북부여 건국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고조선이 북부여로 왕통이 넘어간 다음에도 서쪽 변방에서 고조선의 후계 왕실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남선이 개아지조선(기자조선)을 곧 해씨조선이라고 표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개(기)씨와 해씨가 종족관계로 소통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이 기(箕)씨의 후예들이 번조선 말기에 6대에 걸쳐 150년 동안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위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란 나라가 별도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기씨들이 고조선 후기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씨조선이라는 말이 다시 생겼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위만의 난을 당해 기준왕(箕準王)은 배를 타고 피신하여 한반도의 마한으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 이미 마한이 있었기 때문에 간 것이지 기준왕이 마한을 세운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준왕이 고조선 후계나라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위만의 침략으로 번조선의 기준왕이 망한 것을 가지고 고조선(고조선의 후계나라)이 망했다고 말하거나, 고조선이 마한으로 승계되었다고 말할지언정 위만정권은 고조선의 후계나라를 대표할 자격도, 정통성도 전혀 없는 것이다. 이때 최숭(崔崇)도 위만을 피해 평양으로 피신하여 낙랑국을 세우게 된다.

셋째, 위만이 패수를 건너 망명한 척하다가 반역을 꾀해 정권을 잡은 때가 B.C.194년이다. 위만의 등장은 사마천의 “사기”입장에서 보더라도 ‘조선열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漢)나라에 변방정권이 출현한 것을 의미한 것이지, 단군 고조선의 후계정권을 의미하지 않았다. 원문에 고조선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이 당시 고조선의 단군 왕통은 이보다 이른 B.C.238년에 북부여의 해모수로 넘어갔었다. 고조선은 중앙에 진조선이 있었고, 서쪽에 번조선, 남쪽 한반도에 막(말)조선이 있어서 3조선 체제로 국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했다. 이 통일정부를 진국(辰國)이라고도 하는데, 작게는 진조선을 가리키기도 한다.

“관자”에 나오는 발(發)조선은 번(番)조선(후의 기준조선)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사기”의 ‘진번(眞番) 방중국(旁衆國)’을 “한서”에는 진번(眞番) 진국(辰國)으로 표기한 것에서 진국(辰國)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진조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진국은 위만이나 한(漢)의 침략을 잘 막아내 건재했다. 다만 이들 문헌상의 진국은 시기적으로 북부여에 통합되지 않는 나머지 고조선의 후계나라들의 일반적 통칭일 것이며, 이 중에는 남쪽으로 남하한 진국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국의 모태는 진조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로써 고조선이 3조선 체제로 통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붕괴이후에 북쪽 진조선의 정통은 북부여의 해모수가 받았고, 서쪽 번조선의 정통은 기준왕의 받아서 마한으로 갔다고 할 수 있다. 평양에는 최숭의 낙랑국이 있었다.

고조선의 붕괴시기에 혼란을 틈타 거수국들이 자웅을 겨룰 때, 중앙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서쪽 변방에 나타난 떠돌이 도둑떼가 위만이다. 위만조선이라는 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단재 신채호는 그냥 위씨(衛氏)라고만 썼고, 그를 유구(流寇:떠돌이 도둑)라고 했다. 위만은 무리 1천명을 이끌고 가짜 상투와 가짜 조선옷을 입고 나온 도망자들이다. 이 도망자들이 고조선의 변방 정부인 준왕을 내쫓고 새 정권을 세웠다. 이 말은 위만정권이 한(漢)의 괴뢰정권은 될지언정 고조선의 정권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위만정권은 결코 고조선의 후계정권이 아니다. 또 이런 도망자들이 평양 대동강까지 들어 왔다는 주장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3대 87년으로 종말을 고한 위만정권은 한국사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끝으로 가장 불쌍한 것은 B.C.108년 위만정권의 멸망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인식하는 한국학자들이다. 겨우 3대 87년(B.C.194년~B.C.108년)을 변방에서 도둑 집권한 자가 어떻게 고조선의 후계 나라가 된다는 말인가? 자존심은 차치하고 상식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 식민사학이 억지를 부려왔다. 위만이 있건 없건 서쪽 변방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조선의 번조선 국민들이었다.

당시 고조선 사람들이 위만의 손자 우거왕을 살해한 것에서 그들의 민심이 어떠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고조선 사람들이 우거왕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민심이 우거왕을 자국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정권이 고조선의 후계 왕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번조선의 기준왕을 끝까지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과 북부여를 신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위만을 과연 한국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한마디로 한국역사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위만과 고조선, 이 둘 사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고조선 변방의 준왕이 투항해온 위만에게 서쪽 땅 100리를 내주었으나, 왕명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가 위만이었고, 또 반란정권을 세웠다. 

따라서 윤내현은 “일부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기자의 후손인 준(準)을 고조선의 왕으로 잘못 서술함으로써 위만이 준으로부터 빼앗은 정권이 고조선의 정권이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만이 침략한 곳은 고조선의 변방이지, 고조선의 중앙정부가 아니며, 위만정권 자체가 고조선 정권이 아니라는 것이 윤내현의 주장이다.

또 윤내현은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난하(灤河) 동부 유역에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세웠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있었던 곳도 요서(遼西) 지방인 난하 유역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평양 대동강에 위만조선이 있다고 보는 이병도 이래 식민사학 계열의 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이다.

현재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국사 연표중의 고조선편. 고조선 건국은 B.C.2333년으로 기록했으나, 고조선 멸망연대를 B.C.108년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중국 국가박물관에서도  B.C.108년을 고조선멸망이라고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사진 / 이찬구 기자)
현재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한국사 연표중의 고조선편. 고조선 건국은 B.C.2333년으로 기록했으나, 고조선 멸망연대를 B.C.108년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중국 국가박물관에서도  B.C.108년을 고조선멸망이라고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사진 / 이찬구 기자)

이처럼 한국고대사의 암적 존재인 위만정권 87년은 우리 고조선사가 아니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위만의 87년사를 삭제하고, 고조선의 멸망으로 둔갑한 위만의 멸망 B.C.108년을 삭제해야 한다. 고조선은 B.C.108년에 한(漢)에 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 국가박물관의 역사연표에 있었던 “고조선 :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전 108년도 삭제되어야 한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은 중국이 노리는 동북공정의 핵심에 속는 것으로써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연표이다. 이런 잘못된 역사연표는 중국 국가박물관뿐만 아니라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다. 우리의 역사관이 아직도 중국에 포로로 잡혀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 고대사는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해모수의 북부여를 거쳐 주몽의 고구려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 사이에 위만이 낄 틈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위만정권의 멸망연도인 ‘기원전 108년’을 고조선의 멸망으로 가르치고 있는 현행 한국사교과서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더 이상 위만조선=고조선이 아니다.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말한 것은 ‘나라의 주권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주입하려는 일제 침략식민사학이 만든 전형적인 역사 조작에서 나온 것이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그대로 위만조선이 망한 것이지 고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위만은 우리 역사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 단재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단호히 말한 것처럼 위만은 이족(異族)의 도둑으로 우리의 변경지방을 침탈하였으니 우리 역사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만정권은 아(我)가 아니고 비아(非我)였던 것이다.(다음호에 이어서)

관련기사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