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의 “고려사”에서 시작된 3조선설...중화 사대(事大)의 시초가 되었다

위만정권과 한사군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식민사학을 청산할수 있어

 “중국의 동북공정=한국 식민사학”을 국민혈세로 뒷받침해주는 한국학자들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아닌,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바로잡는 역사혁명이 필요해

(좌로부터 적색표시) 평양 대동강 주변에 그린 이기백의 위만조선(한국사신론,1999년), 조선총독부가 대동강 남쪽 토성리를 낙랑군 치소로 표시(조선고적도보, 1915년), 현행 한국사교과서의 낙랑군 표시(비상교육, 2021년) (자료편집/이찬구)
(좌로부터 적색표시) 평양 대동강 주변에 그린 이기백의 위만조선(한국사신론,1999년), 조선총독부가 대동강 남쪽 토성리를 낙랑군 치소로 표시(조선고적도보, 1915년), 현행 한국사교과서의 낙랑군 표시(비상교육, 2021년) (자료편집/이찬구)

1485년 왕명으로 서거정 등이 완성한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 고려말 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통사이다. 고조선을 단군조선이라 칭하고, 그 건국을 무진년 즉 B.C. 2333년과 그 존속연대를 1048년으로 확정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우리역사 편년에 넣는 과오를 범했다.

소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설을 확립한 것은 이제 보면 국통을 어지럽힌 것이라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위만조선이 3조선의 하나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부터 인가?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본래 3조선설은 부여조선, 진변조선, 낙랑조선인데, 정인지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라 함에 따라 난적(亂賊) 위만이 문득 조선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비난하였다.

정인지의 “고려사”에서 시작된 3조선설...중화 사대(事大)의 시초

단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역사에 위만정권을 우리 역사의 범주로 끌어들인 사람이 정인지(鄭麟趾)라는 것인데 근거가 있는 말인가?

정인지가 역사편찬에 관여한 것은 1451년 “고려사”편찬인데, 이 “고려사”의 58권, 지리3에서 ‘평양부’(平壤府)를 설명하면서 3조선설이 나온다. 놀라운 일이다.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이를 분석하면, 우리 고대사를 전(前)조선, 후(後)조선으로 양분하고, 거기다 위만조선을 보탰다. 이런 3조선설의 근거가 된 것은 오로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평양만이 중심이 된다는 의식이 역사해석을 크게 망쳤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지리적 편견에서 자기 지방을 높이려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바로 ‘왕험성’을 ‘평양’으로 해석하고, 그 평양을 오늘날 대동강 평양으로 인식한 것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초 선비들의 최대 맹점은 평양이 오로지 대동강 평양밖에 없다는 닫힌 생각이었다. 평양이 대동강 평양 이외에도 또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연암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요동의 봉황성도, 요양현도 또 하나의 평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금의 평양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영토를 팔아먹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뀌던 것처럼 ‘패수’라는 이름도 따라서 옮겨졌다.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고 하는 이들은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이 패수이다’라고 한다...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들은 자기 영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하는 것이다”(“열하일기”)”

신채호도 ‘평양패수고’에서 지적한 것처럼 3조선시대의 평양은 ‘고(古)평양’이고, 고려 이후의 평양은 금(今)평양이므로 이 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즉 고평양과 금평양은 ‘같은 평양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검성의 평양은 고평양이므로 요동의 해성(海城)이라고 보았으며, 오늘의 평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도 금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요양(遼陽)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이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정인지의 3조선설은 고평양과 금평양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결론이므로 3조선설은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런 오류를 범했는가? 이유는 기자에 이어 연나라 사람 위만까지 끌어들여 중국을 중화로 사대(事大)하려는 심사 때문이었다고 본다. 이로써 중화사대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왕검성의 평양을 고평양으로 보지 않고 금평양으로 우기는 자는 옛 학자들뿐만 아니라, 최근의 이병도, 이기백에게까지 이른다. 연구하지 않고 남의 것을 베끼는 대부분 앵무새 같은 학자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다.

본래 전조선, 후조선설은 1287년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보인다. “제왕운기”는 전조선기(前朝鮮紀), 후조선기로 나누어 보았고, 위만에 대하여는 후조선 준왕의 왕위를 찬탈한 참주(僭主)로서 하늘의 재앙을 받았다고 보아 정통론의 관점에서 완전 배제 시켰다. 물론 크게 보면 기자조선도 문제지만, 고려 숙종(1102년)에 평양에 기자사(箕子祠)를 건립하여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온 유풍이 결과적으로 사대적 관점에서 기자조선을 편년에 넣게 되었다고 본다.

문제는 고려말까지 위만을 왕위의 찬탈자인 참주로 인식했었는데, 어떻게 조선초에 들어와 우리역사에 편입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역사적으로 위만정권은 초기에 한(漢)나라의 변방정권이며, 반란정권이며 괴뢰정권이었다가 나중에 흉노의 괴뢰정권이 되었기 때문에 고조선의 정통성과 결코 결부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변방의 위만정권은 위만정권일 뿐이요, 고조선도 아니다. 더더욱 평양 대동강에 있지도 않았다.

특히 고조선의 왕통을 위만에 연결하려는 시도는 차단되어야 한다. 북부여는 B.C.239년 고조선의 왕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B.C.108년 위만정권의 멸망과 고조선의 왕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 역사가 빨리 위만정권의 망령에서 벗어나 역사의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 특히 위만과 한의 전쟁을 우리 입장에서 ‘조(朝)-한(漢)전쟁’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단지 ‘위만-한의 전쟁’일 뿐이다.

위만정권과 한사군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식민사학을 청산할수 있어

우리는 위만정권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위만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漢)이 세운 한사군의 망령에서도 동시에 벗어나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여기로부터 식민사학을 청산할 수 있다. 

단재의 견해에서 따르면, 고조선의 후계나라들인 조선열국이 위만의 난(亂) 진압에 참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후대에 위만을 조선왕으로 둔갑시키고, 위만정벌을 한(漢)의 단독 정벌인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조선열국의 참전을 누락시켰다고 했다. 사마천이 ‘조선열전’에 한사군의 이름을 열거하지 못한 것은 당시에 조선열국인 동부여, 북부여, 고구려가 강하게 버티고 있었고, 한사군 설치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곧바로 한사군 설치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끊임없이 고구려가 한(漢)의 동정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9월 13일자 중앙일보 단독보도에 의하면, 중국국가박물관에서 열린 청동기전의 ‘한국 고대 역사 연표’에 철기시대는 고조선 후기부터 신라·백제·가야·통일신라·고려·조선 순서로 구분했지만, 고구려와 발해는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설상가상으로 유독 눈에 띤 것은 중국 식민지라는 소위 한사군(漢四郡)이었다. 한사군에 대한 중국박물관 측의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08년 서한(西漢, 중국 한나라 전기) 정부가 한반도 북부와 중부에 낙랑(樂浪)·현도(玄菟)·진번(眞番)·임둔(臨屯) 네 개 군을 설치했다. 역사는 ‘한사군’이라고 칭한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 세 개의 부락 연맹(마한·진한·변한)이 형성됐다. 세 개 부락은 이후 백제·신라·가야로 발전해 한반도 남부의 고대 국가 기초를 이뤘다. 한사군 설립 이후 한반도 남부는 한사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진흙회색도기(泥質灰陶·이질회도)가 출현하기 시작해 3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한반도 남부 지역의 역사를 ‘원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시기는 약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다.”(중국국가박물관)

이 한사군에 대한 설명 중에 유독 한사군의 소재지를 한반도로 특정하고 있다는 점이고,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는 한사군의 문화적 영향권에 속한 원(原)삼국시대라고 한 점이다. 원삼국이란 삼국의 초기역사를 원시(原始)라는 말로 스스로를 비하한 것이다.

위에 있는 중국측의 한사군 설명문은 한국내 식민사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는데 더 놀라울 뿐이다. 식민사학에 동조하고 있는 “시민의 한국사”에는 “낙랑군이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북 지역에 존속한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낙랑군은 한(漢)이 설치한 것이지만, 한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면서 낙랑군을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는 식민사학의 논리를 더욱 공고화해주는 역기능만을 할 뿐, 한사군은 우리 민족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만조선을 우리 민족사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1999년)에서 낙랑군 치소는 평양에서 토성리유적이 발굴된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이미 거짓으로 드러난 일제의 “조선고적도보”(1915년)의 주장을 합리화해주는 망언이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일기장에는 북경의 골동품상이 모여있는 ‘유리창’이라는 곳에 가서 한대(漢代)의 유물들을 구입해 왔다고 적고 있다. 그 골동품들을 평양에 묻어 두었다가 어느 날 ‘신의 손’이 되어 한사군 유물을 발굴했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짜 낙랑유물들이었다. 범죄의 달인들이었다. 이기백이 세키노의 일기장을 읽어봤다면 저런 가짓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도는 “국사대관”(1956년)에서 한사군의 한문화(철기문화)는 주변사회는 물론이요 남방지방, 일본사회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극구 찬양을 하고 있다.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 말로 사실은 한사군이 중국 문헌(후한서)에 요동(遼東)에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이병도와 이기백이 큰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사군은 요동(지금의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 논란의 대상도 아니다. 지금은 쌀 팔아서 사마천 “사기”를 구입하던 때가 아니다. 인터넷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원문을 볼 수 있다. 더 이상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또 이병도는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중국의 한 콜로니(식민지)가 된 동방군현은 발달된 중국의 고급의 제도와 문화-특히 그 우세한 철기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의 싹을 트게 했다.~~일정시대에 낙랑·대방 양군시대의 유적 유물의 발굴·발견으로 인하여 새로운 재료와 지식을 제공해준 점도 적지 않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독자적인 통치능력이 부족해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행복한 백성으로 살았다는 의미를 애써 담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동북공정=한국 식민사학”을 국민혈세로 뒷받침해주는 한국학자들

이러한 내용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와 중국의 동북공정 의식과 같으며,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거의 선진문화를 중국에서 배워왔다고 기록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중국의 식민지든지 일본의 식민지든지 식민지 그 자체를 미화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것으로 한국내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뭐라 항의할 수도 없다. 원죄는 한국 식민사학 학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학자의 책으로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할만한 바른 역사책 하나도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중국의 동북공정=한국 식민사학이라는 말이다. 이를 주류학자라는 이유로 국민혈세를 마음껏 받아 열심히 뒷받침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동북공정에 지고 말았다.

특히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에서 한사군의 “낙랑문화는 한인(漢人)에 의한 문화였으며, 만일 그 제작과정이나 사용자만을 문제로 한다면 고조선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기백의 의도는 낙랑문화의 선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려는데 있었겠지만, 한사군 문화는 한인(漢人)문화이지 고조선문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기백이 모처럼 옳은 말을 했다. 그럼에도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한국사의 중심부에 옮겨놓았다. 이런 중국의 한사군 식민지를 통해 당시 일본의 식민지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병도의 “국사대관”은 고대편을 ‘한군현(漢郡縣) 설치 이전의 동방 제(諸)사회’와 ‘설치 이후의 동방 제(諸)사회’라 시대구분을 하였다. 이는 한군현(漢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그 이전에 고조선이 서고, 이후에 한(漢)의 군현정치가 있었다고 봄으로써 한사군 중심론을 전개하고 단군의 고조선을 한사군의 곁다리 정도로 보았다. 이병도가 쓴 한군현(漢郡縣)이란 말 자체가 한사군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잘못된 용어이다.

평양에는 한사군이 아닌, 고조선의 후계나라인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다

최근 북한 평양에는 낙랑문화 관련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준공했다는 보도가 9월 29일 있었다. 이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이 아니라, 고조선의 후계나라인 최리(崔理)의 낙랑국을 의미한다. 한사군을 청산하고 본래의 낙랑국을 기념하는 일은 고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민족사관이다.

윤내현은 평양(대동강)의 낙랑국은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하고 고조선의 서부지역을 잠식해 들어오자 위만에게 항거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고조선의 구성부족이 있었고, 또한 한(漢)이 위만조선을 침략하자 이에 항거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고조선의 구성부족이었던 토착세력도 있었는데, 그들은 오늘날 요하 동쪽에 정착해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낙랑국은 이런 정치세력 중의 하나였다고 본다면 평양 대동강에 중국의 한사군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1600년 전 집안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릉비의 서두에는 “고구려의 추모(주몽)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천제의 아들’임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천제는 고조선의 임금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기도 하므로 북부여가 고조선을 이어 임금을 천제(天帝)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아닌,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바로잡는 역사혁명

따라서 우리 민족의 국통(國統)이 ‘고조선-위만조선-한사군’과는 무관하게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계승되었음을 1600년이 지난 지금, 광개토호태왕비가 국내 식민사학자들과 국외 동북공정론자들에게 웅변으로 경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망령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정통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위만조선과 한사군 때문에 한국사 범주에서 북부여와 고구려가 축소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한국사 범주에서 삭제하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그 자리에 바르게 놓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려사”와 “동국통감” 이후 실로 500여년 만에 이루는 역사의 혁명이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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