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의 “동국통감”1048년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했을 것

동국통감의 무진년건국과1048년 역년, 단군세기의 무진년건국과 1048년 역년

“시민의 한국사”에 실린 대통령 추천사는 취소되어야

역사는 여야를 초월하여 민족의 주체적 관점에서 크게 보아야

 

그렇다면 “시민의 한국사(1)”가 인용한 대로 “동국통감”이 확정한 기원전 2333년을 못 믿겠다는 것인가? “동국통감”이 정녕 거짓말인가? 아니면 한국사연구회 70명의 학자들이 시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우리의 옛 문헌인 “삼국유사”는 ‘위서(魏書)’를 토대로 고조선의 건국은 중국의 요(堯)와 같은 때라고 했다. 즉 요가 무진년에 건국했으면 단군도 무진년에 건국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요임금 즉위한 해를 무진년으로 보고, 그로부터 50년 후(경인년)라고 했다. 문제는 요의 즉위연도를 밝히면 되는데, 중국에서 요의 즉위연도를 무진년으로 본 것은 “자치통감 외기”(1078년)에 의한 것이며, 송(宋)나라 소강절이 “황극경세”에서 갑진설을 내놓아 B.C.2357년(갑진)이라고 했고, 이 갑진설이 중국의 “자치통감 전편”(1264년)에 채택되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년대를 어떻게 기록했나?

세조가 서거정(徐居正)에게 우리나라 고대사를 재정리하라고 왕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역사를 정리하여 1485년에 발간한 것이 “동국통감”이다. 고조선을 ‘단군조선’이라고 표기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동국통감”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B.C. 2333년(무진년)이 공식적으로 실리게 된 것이다.

“동국통감”의 핵심은 단군의 무진년 건국과 단군의 역년(歷年) 1048년이다

그 연대 산출의 근거는 어디서 나왔나? “삼국유사”는 갑진설이 나오기 전이므로 요(堯)가 무진년(B.C.2333년)에 건국한 것으로 보고, 그로부터 “50년경인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50년=경인년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경인년은 무진으로부터 50년이 아니라 23년째=B.C.2311년(경인)이 되고, 또 50년째는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B.C.2284년이 된다. 일연은 이렇게 두 연대가 틀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임의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요의 무진년설이 무너지고, 소강절이 B.C.2357년(갑진)을 요의 건국연대로 확정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갑진년으로부터 25년 후(만 24년)에 해당하는 B.C.2333년이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로 확정된 것으로 이해해왔다.

애초에 “삼국유사”가 단군의 건국연대를 경인년설로 보게 된 것은 요(堯)의 건국 연대를 잘못 짚은 데 있었다. 일연이 말한 요의 무진년설은 “자치통감 외기”에서 찾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과적인 말이지만, 요의 건국연대 B.C.2333년이 사실은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였던 것이다. 오히려 중국이 우리의 단군의 연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여기에 25년을 더해 자기네가 동북아의 최고(最古)국가로 자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리어 우리가 이 무진년설을 중국에 빼앗긴 채 경인년인지 아니면 정사년인지 본의 아닌 혼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거정이 단군의 건국연대인 B.C.2333년(무진)을 확정하게 된 것은 요의 건국(B.C. 2357년)으로부터 25년째라는 시차를 알아서 정한 것이 아닐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의 건국이 단군보다 늦을 수 있기 때문에 요의 건국연대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무진년 건국(B.C.2333년)은 서거정이 중국문헌이 아닌, 우리에게 전해오는 고사서(古史書)를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B.C.2333년을 확정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서거정은 단군조선의 역년을 1048년으로 정했을 것이다.

필자는 단군조선 무진년 건국연대 확정의 근거가 될 만한 사서를 찾아보겠다. 연결 고리는 두 가지이다. “동국통감”에 있는 단군의 무진년 건국과 단군의 역년(歷年) 1048년이다. ‘무진’과 ‘1048년’을 검색어로 정하고, 1485년의 “동국통감”보다 앞서 나온 문헌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서거정이 살았던 15세기 이전의 문헌을 든다면, 목은 이색의 “목은문고”, “세종실록”의 ‘세종 18년 병진(1436) 12월 26일’조에 나오는 권지의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와 1462년 권람의 “응제시주”가 있다.

본래 권근의 “응제시”(應製詩)에 주석을 붙인 것이 권람의 “응제시주”인데, 서거정은 1470년에 이 “응제시주”의 복각 재판본을 발행해준 적이 있다. “목은문고”에 무진년 건국이 나오고, “응제시주”에 바로 단군 역년 1048년이 나오며, 권지의 “동국세년가”에는 무진년 건국과 역년 1048년이 동시에 나온다. 권지는 권근의 아들이며,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며, 서거정은 외손자이다.

그러면 15세기에 나온 “응제시주”나 “동국세년가” 이전(以前)의 사서 중에 무진년 건국과 1048년의 단군 역년이 수록된 최초의 문헌은 어느 문헌일까? 현재로서는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역년 1500년, 1908년설이 있고, “제왕운기”에는 무진년 건국에 역년 1028년이라고 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평양부)에는 “단군고기”를 인용하여 1038년이라고 했다. “제왕운기”의 1028년은 무정8년 을미(乙未)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이것은 착오이다. 을미년은 무정 8년이 아니라 무정39년이다. 그러면 1048년이 나온다. 그밖에 무진년과 1048년을 찾을 수 있는 문헌은 고려 말 이암(1297~1364)의 “단군세기”가 유일하다. 

“단군세기”의 2096년을 쪼개기하여 단군2기를 기자조선으로 변질  

그런데 “단군세기”는 무진년(B.C.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명시하고, 단군의 총 역년을 2096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2096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표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고조선 역년 2096년을 도읍지 이동별로 3기로 나누었다. (그림 / 이찬구 기자)
필자가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고조선 역년 2096년을 도읍지 이동별로 3기로 나누었다. (그림 / 이찬구 기자)

이처럼 “단군세기”가 말한 단군조선의 역년 2096년은 도읍지 이동을 기준으로 3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단군이 신시를 이었다고 했으므로 신시 아사달시대라 한다. 다른 문헌에는 또 완달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1기 아사달시대는 1048년, 2기 백악산 아사달 시대는 860년이고, 나머지 3기 장당경 시대는 188년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처럼 단군역년 1048년은 전체 단군조선 역년 2096년 중의 제1기에 해당하는 역년이다.

서거정은 1기 1048년을 단군조선의 역년으로 인식한 것 같다. 그 다음으로 1기와 2기를 합하면 1908년(1048+860)이 나온다. 단군역년 2096년 중에 1908년을 단군역년으로 인식한 책이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단군 역년이 저자들의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것은 원본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군세기”의 2096년을 여말선초의 학자들이 쪼개기를 하여 단군2기를 곧 기자조선으로 변질시킨 것은 한국사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동국통감”의 1048년을 기록한 “단군세기”...독보적이며 최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048년이든지 1908년이든지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라도 고조선 건국연대인 B.C.2333년(무진)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동국통감”이나 “삼국유사”의 역년을 모두 수용하고 있는 사서는 이암의 “단군세기”밖에 없다. 따라서 서거정의 “동국통감”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참고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단군세기”가 1048년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서 중에 독보적이며 최초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단군세기”는 우리 고대사의 원형을 잘 담고 있는 진서(眞書)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믿기 어렵다고 한 "시민의 한국사"와 고조선이 무진년 B.C. 2333년에 건국하고 1기 1048년의 역년을 최초로 밝힌 고려 말 이암의 "단군세기"(오른쪽). (사진 / 이찬구 기자)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믿기 어렵다고 한 "시민의 한국사"와 고조선이 무진년 B.C. 2333년에 건국하고 1기 1048년의 역년을 최초로 밝힌 고려 말 이암의 "단군세기"(오른쪽). (사진 / 이찬구 기자)

이처럼 문헌에 대한 진지한 검토도 없이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를 물음표(?)로 남겨 놓은 한국역사연구회 발간 “시민의 한국사”는 우리 고대사를 덮고 감추는 책이라는 면에서 중국학자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쟁점들을 한국학자들에게 질문하면 그 대답은 수십년 동안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다. 중국측이 우리에게 하듯이 한국학자들도 또 우리 국민들에게 똑같은 대답을 해왔다. ‘학술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학술적 토론이란 새로운 학설의 등장을 가로막고 기득권이 자기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쓰는 공통적인 수법이다. 기득권이란 식민사학과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말한다. 필자는 이런 이유에서 역사의 독립을 반대하고 기득권의 논리만을 옹호하며 국민의 눈을 가리는 “시민의 한국사”를 거부하며, 이의 폐기를 요청한다.

역사는 여야를 초월하여 민족의 주체적 관점에서 크게 보고 서술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을 문재인 前대통령이 추천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았고, 이 책의 추천은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실수였다고 본다. 추천사는 취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시민의 한국사”가 포장되어 판매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우롱이며, 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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