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신문왕 5년(685년) 남원경(南原京, 南原小京)이 설치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1339년을 사용해온 자랑스런 남원의 이름

‘전라도천년사’도 시끄럽지만, ‘전라도’ 지명보다 300년을 앞선 남원의 지명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더 훌륭한가?

아니면, 일본지명 ‘기문국’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더 훌륭한가? 

 

지난달 30일 남원스위트호텔에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지방 매체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남원시가 남원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지역민에게 세계유산의 가치를 향유하고자 마련됐다. 여기에는 최경식 남원시장, 임상규 전북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 이정린 전북특별자치도의회 부의장 등 100여 명의 지역 인사들이 참여해 유산의 가치를 공유하고 축하를 나눴다고 전했다.

이날 기념식장에 참석했던 남원의 시민운동가 양경님씨는 1일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3년 동안 눈보라 비바람 맞아가며 생업을 포기하고 자비를 써가며 반대운동(기문국 삭제운동)을 했던 시민들을 우롱하는 일이 또 터졌다. 기문국을 주장한 곽모 교수와 기문가야선양회 대표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전북특별자치도 김관영 도지사는 즉각 표창장을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남원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기념식은 남원 가야고분군의 비전인 ‘남원 세계를 품다’라는 표어를 캘리그라피 연출로 화려하게 수놓으며 시작을 알렸고, 등재경과보고, 축하영상, 유공자표창, 등재 선포행사로 진행됐다.

최 시장은 이 자리에서 “남원시민의 염원과 노력으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며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여 우리 미래세대에게 온전하게 전승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남원에서 열린 세계유산등재 축하 기념식 안내문
지난달 30일 남원에서 열린 세계유산등재 축하 기념식 안내문

앞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비롯한 7개 가야고분군은 지난해 9월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국내 16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런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의 유네스코 등재는 다른 가야고분군과는 달리 처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 초안에 남원을 기문국(己汶國) 정치체로 표기한 것이 발각된 데서 남원시민들의 분노가 시작되었고, 시민들의 역사바로잡기투쟁이 시작되었다.

2021년 9월 9일, 남원 역사시민단체들이 몇 차례 모임 끝에 남원을 일본지명 ‘기문’으로 표기한 것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의 일본 지명인 기문은 『삼국사기』와 같은 국내 문헌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 특히 『일본서기』가 일본군국주의 침략이론인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한 책이라는 면에서 시민단체의 반감이 더 컸고, 시민들의 호응이 따랐다. 시민단체들은 이 기문 지명의 표기를 삭제해달라는 민원을 남원시, 문화재청, 심지어 청와대 국민청원에 까지 수차례 올렸다.

2021년 9월 9일, 남원시민단체들이 남원을 일본지명 기문으로 표기한 것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다.(사진 / 남원 역사시민단체 제공)
2021년 9월 9일, 남원시민단체들이 남원을 일본지명 기문으로 표기한 것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다.(사진 / 남원 역사시민단체 제공)

담장 지자체인 남원시와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처음에 ‘남원은 곧 기문국’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며 시민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대학교수들이 인정한 것을 시민단체가 뭐 안다”고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가야사 복원은 ‘일본사복원’이 되었고, 미결된 채 윤석열 정부로 넘어갔다.

시민단체들은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에 시정을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고, 인수위 내에서 기문국 삭제문제로 수차례 회의가 열린 끝에 2022년 4월 8일 문화재청은 내부보고를 통해 처음으로 기문국을 삭제하고 남원가야를 ‘운봉 고원일대의 가야정치체’로 변경하겠다고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어 문화재청은 5월 9일자 공문을 통해 시민단체 앞으로 기문국(합천의 다라국까지 포함) 지명삭제 처리결과를 공식 통보해주었다.

문화재청이 2022년 5월 9일자로 남원을 운봉고원 가야정치체로 표현하겠다는 공문의 일부(자료 / 식민사관청산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 제공)
문화재청이 2022년 5월 9일자로 남원을 운봉고원 가야정치체로 표현하겠다는 공문의 일부(자료 / 식민사관청산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 제공)

그러나 기문국 지명삭제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남원시와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최종발표(2023년 9월)를 앞둔 시점까지도 기문 삭제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보여주지 못함에 따라 시민단체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자 2023년 6월 2일, 문화재청이 남원시청, 유네스코추진단과 시민사회연석모임(가야사전국연대, 전라도민연대 등)과의 면담에서 기문과 다라를 삭제해서 ‘최종국가의견서’를 제출하겠다고 언급하며 시민단체를 안심시키려고 나름 성의를 보였다.

그럼에도 시민단체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만약 9월 최종발표에서 기문이 포함되어 발표된다면 3년간의 피나는 역사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시민단체에서는 발표를 3개월 앞둔 6월부터 직접 파리에 소재한 유네스코본부에 기문국의 완전한 삭제를 요구하는 서신을 수차례 발송하기 시작했고,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스님의 도움을 받아 유네스코측과 작접 소통했다.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2023년 9월 17일 유네스코는 예상대로 최종발표를 통해 한국의 7개 가야고분이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발표했다. 온 국민은 이를 축하했다.

이와 함께 유네스코 홈페이지에 한국시민단체의 요구를 수용한 내용을 자료(WHC,/23/45.COM/INF.8B4)에 게재했다. 시민단체의 승리였다.

유네스코 홈페이지에는 “한국의 가야고분군에는 오류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기문, 다라 지명에 관한 지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원과 합천의 지명은 기문, 다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설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87페이지에서) 다라국과 기문국 정치체의 이름이 지명 서류 전반에 걸쳐 (서로 다르게) 다양한 경우에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편집 변경을 인정한다’(ICOMOS acknowledges this editorial change)”고 밝혔다. 이는 유네스코가 기문국이라는 일방적인 일본지명의 사용을 부정하고 국제적으로 거부한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시사포커스 2023.10. 10. 보도)

이어 라자르 에룬두 아쏘모(Lazare Eloundou Assomo)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센터 위원장도 “대한민국의 ‘가야고분’ 지명 등록 제안 평가 과정에서 다라국과 기문국 명칭에 대해 여러분(시민단체)이 문제를 제기한 사실도 주목한다”고 언급하였다. 유네스코 내에서 기문, 다라의 지명에 주목한 것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유네스코의 정신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은 한국 가야고분군에 대해 유네스코가 밝힌 원문자료(일부 발췌)와 번역이다.

한국의 남원 가야고분군 등에 대해 유네스코가 밝힌 원문(일부 발췌)과 번역
한국의 남원 가야고분군 등에 대해 유네스코가 밝힌 원문(일부 발췌)과 번역

이와 같이 유네스코가 등재신청서상의 기문국이라는 명칭이 다르게 사용되어 정확성을 유지하지 못했으므로 이 기문국 표현에 대해 변경을 인정한다는 지적이다. 유네스코 등재신청서는 누구도 함부로 바꿀 수 없으므로 기관의 공식적인 승인이 있어야 기문국 지명을 삭제하거나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문국의 지명사용이 공식기관을 통해 국제적으로 거부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등재 이후에도 남원시는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기념식장에서 유네스코 등재의 공로로 상장을 받는  곽 모 교수(좌) . 사진 / 시민단체 제공)
지난달 30일, 기념식장에서 유네스코 등재의 공로로 상장을 받는  곽 모 교수(좌) . 사진 / 시민단체 제공)

더욱 가관인 것은 이날 남원스위트호텔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이제까지 기문국 지명을 전파하고 이의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곽 모 교수 등에게 지자체가 상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네스코의 홈페이지 공고내용과도 반대되는 일이다. 기문 지명의 사용을 주장한 교수에게 상장을 준다는 것은 기문 지명이 잘못 사용된 것을 인정하고 이의 변경을 인정한 유네스코의 지침을 지자체가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아닌가. 

기문국 지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행정력을 소모하고,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생업을 포기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는지 아는가.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원이 기문국이 아닌 남원 그대로의 지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신라 신문왕 5년(685년) 남원경(南原京, 南原小京)이 설치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1339년을 사용해온 자랑스런 남원의 이름. ‘전라도천년사’도 시끄럽지만, ‘전라도’ 지명보다 300년을 앞선 남원의 지명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더 훌륭한가? 아니면, 일본지명 ‘기문국’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더 훌륭한가?

남원과 남원시민들이 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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