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정부 이송 11일 만에 이태원특별법 장고끝에 거부권 행사
野에 재협상 제안한 윤재옥, “독소조항 제거하면 합의처리 가능”
정부, ‘참사 피해지원 위원회’(가칭)도 설치·운영하겠다고 밝혀
유족협, “정부는 유족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해”
한동훈 “국민 갈등 뻔해...정합성 있는 법, 野와 협의할 준비돼”

1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판교 제2테크노벨리 기업지원허브 창업존에서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를 주제로 일곱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개최했다. ⓒ대통령실
1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판교 제2테크노벨리 기업지원허브 창업존에서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를 주제로 일곱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개최했다. ⓒ대통령실

[시사포커스 / 김민규 기자]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이하 이태원특별법)에 대해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결국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 사안이 다시 주요 정쟁 요소로 재점화 될 것으로 보인다.

◆ 취임 후 5번째 거부권 행사한 尹… 정부, ‘피해자 배상·지원’에 중점

대통령실은 30일 오후 “윤 대통령이 이태원특별법 재의요구안을 재가했다”고 공지했는데, 이는 지난달 9일 국회에서 이태원특별법이 야당 단독으로 처리된 지 21일 만으로 윤 대통령 취임 이후로는 5번째 거부권 행사이자 ‘거부된 법안’으로는 9개째에 해당한다.

앞서 지난 19일 정부로 이송돼 내달 3일이 처리 시한이던 이 법안은 과거 양곡관리법·간호법·노란봉투법·방송3법·쌍특검법의 경우와 달리 대통령 거부권 행사까지 소요된 기간이 열흘을 넘겼을 정도로 가장 길었다는 점에서 윤 대통령도 장고 끝에 결정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거부권 행사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선 앞서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게 재의요구안을 건의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참사로 아픈 아픔이 정쟁이나 위헌 소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한 총리는 “검경 수사 결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명확한 근거도 없이 추가적인 조사를 위한 별도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게 과연 희생자와 유가족, 국민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며 “특별조사위에 부여된 강력한 권한이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소지가 크다. 이 법안은 자칫 명분도, 실익도 없이 국가 행정력과 재원을 소모하고 국민 분열과 불신만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 이번 결정으로 크게 상심할 이태원 참사 피해자와 유족들을 의식해 정부는 이들에게 관련 재판이 확정되기 전에 배상·지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10·29 참사 피해지원 종합대책’을 내놨는데,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같은 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한 바에 따르면 피해자 생활안정을 위한 지원금·의료비·간병비 확대, 심리안정 프로그램 확대, 희생자 추모시설 건립 등을 추진할 계획이며 이를 확실히 추진할 수 있도록 국무총리 소속 ‘10·29 참사 피해지원 위원회’(가칭)도 설치·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유가족들이 요구해왔던 영구적인 추모시설도 유가족,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 건립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지원과 희생자에 대한 온전한 예우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이를 위해 특별법의 취지를 반영한 피해지원 종합대책을 조만간 유가족과 협의를 거쳐 수립, 시행토록 하겠다”고도 강조했으나 정작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이미 이날 오전 재의요구권 심의·의결 소식을 접하자마자 거세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이날 오후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유족이 언제 재정적 지원과 배상을 요구했나. 유족이 바란 것은 오직 진상규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유족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했다”며 “대통령 거부권은 무제한으로 행사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윤 대통령과 정부 관료, 국민의힘 의원들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역사에 남을 죄를 지었다”고 공식 입장을 내놨고, 정부가 피해지원 종합대책 수립을 위해 유족과 협의하겠다고 한 데 대해서도 이들은 응할 뜻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野 “권한을 민의 거부 수단 삼다니 지독해…유족 보상을 명분 삼지 말라”

30일 임오경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오훈 기자]
30일 임오경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오훈 기자]

일단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안 재가로 이태원특별법은 정부 이송 11일 만에 다시 국회로 돌아가게 됐는데, 당초 이 법안을 통과시킨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권에선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즉각 한 목소리로 성토했다.

임오경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국민이 위임한 (거부권 행사라는) 권한을 아내의 범죄 의혹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으로 부족해 사회적 참사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민의를 거부하는 수단으로 삼다니 참 지독하다”며 “재난을 막고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기본책무를 윤 대통령은 부정했다. 참사 유가족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는 대통령이 어떻게 국민을 품겠는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임 원내대변인은 ‘이태원특별법은 명분도 실익도 없이 국민 분열과 불신만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 한 총리의 이날 발언도 꼬집어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에 무슨 명분이 있고 실익이 있으며 어떻게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말인가”라며 “유가족이 바란 것은 보상이 아니라 오직 진상규명이었다. 윤 정부는 유가족의 진상규명 요구를 거부한 것도 모자라 배·보상 운운하며 유가족을 모욕하지 말라. 이런 정부 태도가 유가족들을 더 치를 떨게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특조위 구성이 독소조항이라고 강변하는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정부여당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했다. 이태원특별법의 핵심인 진상조사를 빼고 빈껍데기만 남겼어야 하나”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무책임한 정부의 적반하장에 분노한다. 정부의 책임을 가리려는 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을 국민은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에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이날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있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해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과 만나 이태원특별법을 수용해달라고 부탁했고 현장 방문을 통해 유가족들과 피해자를 위로해달라고 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다. 대통령은 현장에 오지도 않았고 유가족 손 한 번 잡지 않았는데 참 비정하다”고 윤 대통령을 비판했으며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 김건희 여사, 대통령, 정부여당은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야당 200석의 명분과 당위를 제공하고 있는 일등 선거운동원”이라고 꼬집었다.

또 정의당 지도부도 같은 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 목소리로 거부권 행사를 규탄했는데, 배진교 원내대표는 “보상과 지원책은 국가 부재로 일어난 참사에 유족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지 정부여당이 시혜 베풀 듯 입막음용으로 주는 게 아니다. 보상을 이태원특별법 거부권 명분으로 삼지 말라”고 일갈했으며 김준우 비상대책위원장은 여당인 국민의힘을 향해 “권력자의 눈치가 아니라 국민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이 있다면 다시 국회의 시간이 왔을 때 올곧은 선택을 해달라”고 촉구했다.

◆ 與 “野, 무리한 법 밀어붙여 거부권 유도해…독소조항 없애면 합의할 것”

30일 정희용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오훈 기자]
30일 정희용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오훈 기자]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국회에 다시 돌아온 법안은 재의결 절차를 밟게 되는데,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표가 나오지 않을 경우 자동 폐기되는 만큼 여당에서도 이태원특별법 재의결 협조에 나서줄 것을 주문한 발언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일단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앞서 이날 오전 원내대책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태원특별법에 대해 “국회의장이 중재해서 여야 간 협상이 90% 가까이 이뤄진 안과도 훨씬 동떨어진 안이라 재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민주당이 재협상에 응하면 공정성이 담보되고 전례 없던 독소조항도 제거된다면 여야 간 합의 처리할 수 있다”고 조건부 협상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 뿐 아니라 국민의힘에선 같은 날 정희용 원내대변인 논평을 통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도 정당화했는데, “이번 법안에 따르면 특별조사위원은 11명, 특조위 직원은 60명으로 구성하게 돼 있어 한마디로 ‘세금 먹는 일자리 특별법’이 될 것”이라며 “특별조사위원 11명 중 야권 추천 인사가 7명으로 특조위 구성의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됐고 특조위가 ‘불송치 또는 수사 중지된 사건’의 기록까지 열람할 수 있도록 규정해 재탕·삼탕 기획조사의 우려까지 있다. 이렇게 무리한 법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도록 유도해 이를 총선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 원내대변인은 거듭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야당의 반민주적 입법 폭주와 정치공작에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국민의힘은 야권에 특조위 구성의 공정성 담보와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재협상을 제안한 바 있는데 지금이라도 재난의 정쟁화를 멈추고, 국민 모두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여야 협상안을 만드는데 나서달라”고 촉구했고, 앞서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이날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 갈등이 뻔히 예정된 것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합성 있는 법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당은 민주당과 그런 부분에서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야당에 공을 던졌다.

하지만 민주당에선 같은 날 오후 선다윗 상근부대변인이 국회 소통관 회견을 통해 “검찰은 과거 경찰 내부 보고서를 토대로 경찰이 이태원 참사 발생을 사전에 인지했다고 판단해 경찰 지도부를 기소했지만 지난 19일에는 무혐의 처분의 근거로 삼았다. 어떻게 똑같은 자료가 기소 근거가 됐다가 무혐의 처분 근거가 되나”라며 “한 손으로 기소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변호하는 검찰의 모순적 행태에 실소가 터져 나온다. 국민적 관심사가 큰 사회적 재난에 대한 검찰의 납득할 수 없는 4차원 수사는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와 특검 필요성을 부각시킬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이번 사안과 관련한 여야 간 입장차가 좁혀지기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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