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올림·가족위 온도차 여전…조정 절차 진통 예상

▲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피해 근로자에 대한 보상 등을 위해 구성된 민간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오른쪽)가 구성 7개월여 만에 권고안을 내놨지만 협상 주체들의 온도차는 여전히 큰 상황이다. 사진 / 홍금표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피해 근로자에 대한 보상 등을 위해 구성된 민간 조정위원회가 7개월여 만에 권고안을 도출했지만, 여전히 협상 주체들의 온도차가 큰 상황이 이어지면서 논란이 오히려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8일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이하 반올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족위) 등에 따르면 지난 23일 조정위 측은 지난해 12월 위원회를 구성한 지 7개월여 만에 권고안을 내놓았다.

권고안에는 삼성전자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측에 1000억원을 기부해 공익 법인을 설립할 것을 권고하고, 공익법인 발기인 및 이사회는 경실련·참여연대·대한변협 등 7개 단체가 1명씩 추천해 구성해야 하며 재계 입장을 대변하는 이사는 선정 자체가 금지되는 내용이 담겼다. 삼성전자의 보상 선정 과정 관여 금지 방침도 포함됐다. 권고안에 따르면 삼성전자 대표이사는 공동으로 노동건강인권선언을 낭독하고 보상 대상자에게 서신의 형식으로 사과문을 개별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또한 조정위는 백혈병, 림프종, 다발성골수증 등 12종의 질병을 보상질환의 범위로 규정하고, 보상 대상자를 2010년까지 근무한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공장과 1·2차 협력사에서 생산 및 시설 설치·정비·수리 관련 근로자 중 일정 기간의 최소 근무기간 이상 재직한 후 발병한 사람으로 한정했다.

퇴직 후 인정되는 잠복기간을 의미하는 보상기간은 최대 14년으로 삼성전자는 ‘질환과 업무 연관성을 불문하고’ 치료비 전액을 보상해야 한다. 또한 공익법인은 옴부즈만 제도를 통해 삼성전자 내부 재해관리 시스템 운영 상황과 사업장 내 산업안전보건관리 현황 정보를 매년 제출받고 예방대책사업 및 재해 예방 등에 관여키로 돼 있다.

◆반올림 “합리적, 긍정적” 환영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던 조정위의 권고안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재계와 노동계에 법조계까지 술렁이는 눈치다. 1000억원의 기부라든지 무조건적인 보상 같은 내용의 수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상 내용에 관해서도 세 협상 주체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권고안이 반올림 측에 치우친 내용으로 구성됐다는 얘기가 힘을 얻고 있다. 

오랜 기간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에 관해 투쟁을 벌여 온 반올림 측은 24일 공식 입장을 통해 “조정위가 ‘개인적 사안이 아닌 사회적 사안으로 다루고 신속한 보상과 사과, 항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합 대책 방안을 동시에 마련하겠다”고 한 그대로“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의 기부를 바탕으로 공익 법인을 설립하고 그 법인으로 하여금 보상과 재발방지대책 및 공익 사업의 수행을 총괄토록 한 점은 합리적이며, 삼성전자에게 지난 과오를 청산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반올림은 “재발방지대책에서도 내보 안전보건 시스템에 대해서는 삼성의 입장을 원문 그대로 반영하고 삼성이 난색을 표한 내용들을 완화했다”며 일방적인 권고안이 아니라는 평가를 내렸다.

반올림은 “가령 삼성전자가 거부해 온 반올림 및 시민사회의 직접 외부 감사 대신 공익 법인을 통한 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게 했고, 화학물질 정보공개 역시 공익법인이 영업비밀 보호 기준과 절차를 마련토록 해 삼성과 재계의 주장을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노동인권선언에 대해서도 반올림은 “어차피 사과의 취지가 삼성을 징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강도높은 사과보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인권을 소중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했다.

반올림은 다만 보상에 대해서는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반올림은 “과거에 대한 보상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치료가 필요한 피해자들의 향후 치료비까지 보상할 수 있도록 권고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면서도 “일부 피해 노동자들이 배제될 우려가 있고 보상액 수준이 충분한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반올림 측은 공식 입장을 통해 “조정위가 ‘개인적 사안이 아닌 사회적 사안으로 다루고 신속한 보상과 사과, 항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합 대책 방안을 동시에 마련하겠다”고 한 그대로“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반올림

◆가족위 “조속한 보상 또 지연돼나”
하지만 함께 협상을 진행한 가족위 측에서는 불만스러운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물론 수위가 당초 예상보다 세기는 하지만 현재 아픔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이고 신속한 피해 보상에 관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송창호 가족위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공익법인에 문제를 또 떠넘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가족위 측은 꾸준히 ‘빠른 보상 후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주장해 왔다. 이에 가족위 측은 공익 법인을 새로 설립한 후 다시 구성원을 조성하고 보상안을 마련하겠다는 권고안이 현실적으로 당장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가족위 측은 퇴직 후 12년 이내 발병자 및 재직 중 발병자에 대한 보상과 대표이사 기자회견 방식의 사과와 재단 설립을 통한 재발 방지책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가족위 측의 재단 설립 요구는 재발방지책으로서의 재단 설립이었지 보상 주체로서의 재단 설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反삼성’ 편에 함께 서 있음에도 반올림과 가족위가 협상 초기부터 꾸준히 의견차를 보였던 분위기가 이번에도 재확인됐다는 설명이 나온다. 애초에 가족위가 협상 주체로 나섰던 것 부터가 협상을 주도해 온 반올림 측의 과도한 투쟁에 반발해 피해 근로자의 가족들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시각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가족위는 피해 근로자들의 보상을 위주로 협상에 임해 왔던 반면, 반올림 측은 때로는 과격하거나 불필요하게 지나치다는 평가까지 나오는 투쟁 방식으로 종종 협상을 난항에 빠뜨린 경험이 있다. 이에 조정위 출범을 놓고 진통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가족위가 반올림의 협상 재참여를 달가워 하지 않기까지 했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도 반올림 측은 보상 대상을 조정에 참가하지 않는 피해자로 확대하고 제3자가 참여하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등 당장 피해에 직면해 있는 가족위와 수 차례 엇갈린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가족위 측 입장에서는 이번 권고안 역시 공익 법인 설립과 삼성전자에 대한 감시 등 거시적인 차원일 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권고안일 수 있다는 얘기다.

▲ 삼성전자 측은 돈은 돈대로 내고 보상 선정에 관여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연관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질병까지 보상 대상으로 포함되는 등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삼성전자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 / 홍금표 기자

◆삼성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 고민”
삼성전자 측의 불만은 세 교섭 주체 중 가장 거세다. 돈은 돈대로 내고 보상 선정에 관여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연관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질병까지 보상 대상으로 포함되는 등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삼성전자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우선 1000억원이라는 기부도 만만치 않은 규모인 데다가 여기에 1000억원을 소진하면 추가 출연도 필요하기까지 한데, 이사회에 재계 입장을 반영할 만한 이사는 참여할 수 없고 삼성전자는 보상 선정 과정에도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계에서도 이번 권고안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역시 같은 취지의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가입돼 있는 한 업체의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면 ‘몹쓸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왜곡된 사인을 주는 권고안을 우리 회비 걷어서 운영되는 협회가 왜 받아야 하느냐”고 일갈했다.

여기에 옴부즈만 시스템을 구성해 삼성전자의 영업기밀 시행 규정을 공익법인이 만들고 이를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경영권 침해에 해당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반도체업종의 특성상 반드시 보안유지를 필요로하는 부분이 있는데 영업비밀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24일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에 외부인인 공익법인에서 지정한 옴부즈맨이 정기적으로 감독하고 시스템을 점검하며 시정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경영 침해 가능성이 있으며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권고안”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민간기업을 사찰하는 수준이라는 의견까지 나오기도 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보상대상과 범위도 불만이다. 협력업체 노동자도 보상대상에 포함됨으로써 전 세계 곳곳에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출혈이 만만치 않고, 보상범위 질환도 대폭 넓어지면서다.

특히 보상 범위 질환과 업무 연관성을 불문한 채 치료비 전액을 보전하라는 권고에 대한 논란이 법조계로 옮겨갈 조짐마저 감지된다. 법조계에서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초법적 결정이라며 공적 영역인 산재보험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개별기업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또한 인정되는 잠복기도 너무 길다는 것이 중론이다. 70대 남성의 3분의 1이 암환자인데 60세 은퇴자의 경우 74세까지 보장하라는 것이 말이 되냐는 얘기다.

◆삼자 모두 수정제안 가능성 높아…진통 예상
전체적으로 삼성전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양새가 그려지면서 삼성전자가 조정권고안을 그대로 수용할지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권고안 발표 직후, 백수현 상무 등 삼성전자 측은 코멘트를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자리를 떠났다. 이후 입장문에서도 삼성전자 측은 “권고안 내용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있어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측이 수정제안을 낼 것으로 보고 있다. 불만스러운 내용 투성이지만 큰 틀에서 권고안 자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이재용 체제 확립을 위해 속도를 내고 있는 삼성 측은 엘리엇이라는 복병을 만나 애국심 마케팅을 진행하면서 국민들에게 심리적인 빚을 지기도 했다. 8년여를 끌어온 조정권고안을 거부한다면 비난 여론을 감당키 어렵다.

전반적으로 만족감을 드러낸 반올림 역시 일부 불만족스러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정제안을 낼 것으로 알려졌다. 반올림 측은 조정권고안이 보상 대상자의 재직 기간을 ‘최소 1년’으로 한정해 입사 6개월 만에 재생불량성 빈혈로 숨진 윤슬기씨 등이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보고 있다. 또 보상 대상에 사실상 협력업체·비정규직을 포함시켰지만 조금 더 명시적인 문구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위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유동적이다. 가족위 측이 보상의 시급성 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큰 틀에서는 공감하고 있는 상태에서 삼성전자와 반올림이 모두 수정제안을 낼 것으로 알려지자 가족위 역시 구체적인 부분에서 수정제안을 낼 확률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권고안에 대한 소명시한은 내달 3일로, 조정당사자는 지난 23일로부터 10일의 숙려기간이 지나기 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제안을 서면으로 표명할 수 있다. 조정위는 후속 조정절차를 거친 후 최종 합의문을 작성하게 된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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