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대종교총본사 천궁에서 윤명철 교수 강연

주제 ‘근대 독립전쟁의 주역, 대종교’

대종교의 독립전쟁과 해외에 세운 민족학교, ‘동창학교’와 ‘백산학교’조명

윤세복,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이극로 등 민족교육 선봉...역사와 한글 가르쳐

조선어학회 사건에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안호상, 안재홍 등 대종교인 연류돼

대종교와 나철...“자기희생을 하면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 쟁취를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

대종교가 배출한 한글학자들이 남과 북에서 국어교육 주도...민족동질성의 기초 놓아

지난 2월 18일 미국 예일대학교 초청 특강에 나선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가 한국역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사진 / 윤명철 교수 제공))
지난 2월 18일 미국 예일대학교 초청 특강에 나선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가 한국역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사진 / 윤명철 교수 제공))

윤명철 교수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국립대학 교수)가 지난 2월 예일대 초청 특강에 이어 국내에서 특별 강연을 갖는다. 예일대학교 특강에서는 서양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강의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윤 교수는 내일(30일) 오후 서대문구 홍은동 소재 대종교총본사(총전교 박민자) 천궁에서 ‘근대 독립전쟁의 주역, 대종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29일 미리 배포한 강연자료에서 윤 교수는 “대종교의 제1존재 의의는 개인의 실존적 구원, 계급 또는 특정 집단의 이익 추구가 아니라 개인의 합인 민족의 독립과 해방이었다”며 “만주지역과 연해주 일대에서 대종교는 우리 독립운동, 독립전쟁, 조선 백성들의 생존 그 자체이었다”고 강조하고, 역사학자로서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대종교와 같은 예를 찾기 힘들 정도의 매우 특별한 종교라면서 “우리가 열심히 세계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고백하듯 말했다. 우리 민족이 대종교에 빚을 지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대종교는 종교이기 전에 민족의 생존권을 지킨 독립투쟁기관이었다. 

윤 교수의 강의 자료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역사적인 상황

▲국제질서의 대변화와 독립전쟁

▲독립전쟁 사상적 배경과 행동의 주체인 대종교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단락에 해당하는 민족교육의 요람인 ‘동창학교’와 ‘백산학교’ 부분을 발췌하여 아래에 게재한다.

국권이 상실당하자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인 윤세복은 압록강 중류의 이북인 통화현의 근처인 환인에 1911년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세웠다. 대종교인이 처음으로 세운 해외 민족학교이다.

그는 학교를 세운 목적을 이렇게 천명했다. “한민족의 선조는 백두산록에서 나와 중화민족과 대화민족은 그 가지에 불과한 까닭에 우리들은 노력하여 국권을 회복하여 부여민족과 부여국의 독립발전을 도모하는데 두었다”라고 했다.

이 곳에서 근무한 교사들 가운데에는 역사학자인 ‘박은식’, ‘신채호’ 그리고 국어학자로서 ‘조선어학회사건’ 등에 참여한 ‘이극로’ 등이 있었다. 동창학교는 일본이 폐교시키라고 압력을 가하여 1914년에는 폐교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윤세복은 백두산 근처인 무송현으로 가서 ‘백산학교(白山學校)’를 설립했다. 그리고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흥업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이는 대종교인이었던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강조한 말이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 침탈을 당하고,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조선에서 벌어지고, 이어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무력해진 왕실, 정부와 달리 신진 개화지식인들은 위기를 절감하고 타개책을 마련하는 일에 주력을 기울였다, 현실적인 무장투쟁 뿐 만 아니라 미래의 자산인 청소년들을 양성하는 민족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핵심은 역사와 한글이었다.

1909년 국운이 기울자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대종사(왼쪽)와 역대 대종교 종사(좌측 액자사진부터) 백포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무원 김교헌 종사, 단애 윤세복 종사. 이 사진들은 대종교 총본사에 보존돼 있다. (사진 / 대종교 총본사 제공)
1909년 국운이 기울자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 대종사(왼쪽)와 역대 대종교 종사(좌측 액자사진부터) 백포 서일 종사, 홍암 나철 대종사, 무원 김교헌 종사, 단애 윤세복 종사. 이 사진들은 대종교 총본사에 보존돼 있다. (사진 / 대종교 총본사 제공)

때문에 망해가는 20세기 초의 조선에서는 필자(윤명철)가 ‘자강(自强)사학’이라고 명명한 역사서술과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전형적인 조선적 질서가 이미 깨져나간 상태에서 새로운 인식과 역사의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이 무렵에 관학자들 외에도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은 한학자로서 출발했지만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만주 일대로 건너간 대종교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곳에 거주하는 대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과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이었다.

◆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여러 곳에 민족학교 건설

첫째로 그들은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여러 곳에서 학교를 건설했다. 그 학교에서 중요시한 공부는 군사훈련과 함께 역사와 국어 교육이었다. 명동학교에서 가르친 국사교육에는 『초등대동역사』, 국어 교육에는 『초등소학교독본』을 사용했다.

방학 중에 교사들은 학생들을 인도하여 ‘고적답사대’를 조직했다. 바로 근처인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릉을 조사하는 현장 교육도 실시하였다.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은 『신단민사』, 『신단실기』 등의 역사책을 서술했고, 이 책들은 박은식, 신채호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박은식은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의 윤세복이 세운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또한 그의 도움과 부탁으로 고대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박은식은 동창학교에 머물면서 『동명성왕실기』, 『천개소문전』, 『명림답부전』,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 『대동고대사론』등의 책들을 집필했는데, 그 교열(閱)을 윤세복이 했다.

신채호는 1910년에 중국으로 망명을 했고, 연해주로 가서 윤세복 등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다시 1913년에는 상해로 가서 문일평 박은식 정인보 조소앙 등과 ‘박달학원’을 운영했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1914년에는 만주 집안 일대에 남아 있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답사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무렵의 집안시 일대는 국내성의 서문(西門)이 분명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들, 광개토태왕릉, 광개토태왕비, 장군총 등이 어느 정도 형태를 보존했다. 그가 본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은 우리 고대사와 고구려사를 집필하는데 막대한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단재 신채호, 동창학교 교사로 『조선사』 집필 시작

신채호는 동창학교에서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했다. 이것이 『조선상고사』의 초고일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실제로 첫 부분에 있는 ‘사(史)의 정의(正義)와 조선사의 범위’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독립군들의 교재로 사용됐으니, 그 당시 대종교인들, 독립군들이 어떠한 역사인식을 가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교들은 우리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만주 지역에 세운 대부분의 학교들이 우리 고대역사와 연관성이 깊은 곳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종교에게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국어교육도 매우 중요했다.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켰다. 한말(韓末)에 한글 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후인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져 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다양한 작업들을 했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에서 민족사상이 강화되는 현상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학교에서 실시되던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조선어학회는 사전을 편찬하고 인쇄소에 넘기게 되었다. 이 때 일본은 이 사실을 알고 사전을 펀찬하는 작업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33명을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체포하였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들 가운데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안호상, 안재홍 등 대종교인들이 많았다.

◆ 민족 언어와 글자는 독립에 절대적으로 중요...대종교인들 고초 겪어

고문 끝에 이루어진 재판에서 일제는 이극로에게 징역 6년, 최현배에게 징역 4년, 이희승에게 징역 2년 6개월 등 여러 사람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라고 선고하였다. 이는 민족 언어와 글자가 독립에 절대적으로 중요했으며, 이 부분에도 대종교가 깊게 관여했음을 알려준다. 

만주에 총본사를 두었던 대종교가 해방 후인 1946년 6월 조국으로 환국하여 찍은 단체 사진. 앞줄에 단애 윤세복, 성재 이시영, 우천 조완구 선생 등이 보인다. 조완구 선생 뒤에 이극로 선생이 서 있다. 왼쪽 가슴마다 성명이 새겨 있다. (사진 / 대종교총본사 제공)
만주에 총본사를 두었던 대종교가 해방 후인 1946년 6월 조국으로 환국하여 찍은 단체 사진. 앞줄에 단애 윤세복, 성재 이시영, 우천 조완구 선생 등이 보인다. 조완구 선생 뒤에 이극로 선생이 서 있다. 왼쪽 가슴마다 성명이 새겨 있다. (사진 / 대종교총본사 제공)

1942년 11월, 만주에서는 민족교육과 연관하여 대종교의 ‘임오교변’이 발생했다. 일본 경찰은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 등 21명을 한꺼번에 체포했다. 일본경찰이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사건을 날조한 것이다. 고문 끝에 10명의 지도자가 죽고, 나머지 10명은 감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았다. 

윤 교수는 강연 말미에서 대종교의 중광자인 홍암 나철선생에 대해 “나철이 선택하고, 재조직한 대종교와 이에 동조한 사람들은 그 암울한 시대의 선각자였고, 자기희생을 하면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쟁취를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이었다”고 평가했다.

간혹 일제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대종교가 오늘날은 왜 초라하냐고 조롱섞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종교가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또 다시 탄압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대종교를  연구하는 것이 곧 우리 민족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윤명철 교수는 오늘도 외치고 있다. 

차제에 오늘날 남북이 같은 한글로 언어활동을 하며 그나마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대종교에서 해방 전에 배출한 한글학자(주시경의 제자)들이 분단 이후에 남과 북에 들어가 국어교육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는 점을 첨언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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