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강역에 대한 100년 전쟁 , 신채호 윤내현 VS 이병도 이기백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완간되기 전인 1946년 처음 출간된 총론편인  『조선사론』(광림서림 발행). 사진 / 이찬구 기자)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완간되기 전인 1946년 처음 출간된 총론편인  『조선사론』(광림서림 발행). 사진 / 이찬구 기자)

소위 ‘진보학자’로 알려진 강만길은 1985년 「일제시대의 反식민사학론」에서 “신채호 사학 역시 일본 어용사학의 역사왜곡에 정면으로 맞선 반식민사학으로써의 성격이 두드러지지만, 또 그 때문에 갖는 제약성도 많았다”면서 신채호의 사학을 ‘관념적, 정신주의적 성격이 짙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채호가 지나치게 단군을 받들어 민족의 신성성 등을 강조하였다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이때부터 신채호가 주장한 민족사학의 상징인 ‘대륙 고조선론’과 ‘한사군 한반도 부재론’도 진보진영에서 외면받으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신채호를 사실상 역사학계에서 도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강만길의 이런 주장과 그가 훗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식민사학자인 이병도와 신석호를 정부의 친일행위자 명단에서 빼준 것이 연관이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강단사학계의 주류이론이라는 것이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우리 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만든 식민사학을 계승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에 동조한 일부 진보학자들은 결과적으로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짓밟는데 일조하였다.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함께 짓밟은 진보와 강단 식민사학

김상태는 『고조선과 21세기』에서 독립운동을 둘러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에 있어 핵심을 이루는 문제 중 하나가 고대사 문제였다면서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이 확산되었을 때 고대사 문제는 점점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왜 그런가. 만일 신채호류의 대(大)고조선론을 받아들인다면 마르크스주의 사관으로 통일된 공산주의 이론은 근간이 무너진다. 마르크스주의 사관이 말하는 원시 공산사회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대고조선의 존재 같은 것은 전무하기 때문”(180~181쪽)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발전단계에서 고조선과 같은 대(大) 제국의 국가는 출현할 수 없기에 그 당시 좌파들은 대고조선을 말한 신채호를 지지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를 비판한 명분이 고작 ‘관념적 역사관’이었다. 관념론이란 단순한 철학용어가 아니라 유물론의 반대 입장을 의미한다. 윈시 공산사회에서 어떻게 거대한 나라, 고조선이 등장할 수 있느냐? 그런 대고조선은 상상에서만 가능한, 관념에서 나온 허구라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상적 관념론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타도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신채호는 1920년대에 집필한 『조선상고사』(1931년에 조선일보 연재)에서 상고시대에 우리역사가 웅혼(웅장하고 막림이 없음)하였다고 부각했으며, 상고사의 역사무대를 중국 동북쪽 지역과 요서(遼西) 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동(山東) 지역까지 경영했다고 밝혔다. 신채호에 의하면, 고조선에는 삼조선이 있었는데, 신조선은 길림 흑룡강성과 연해주 남단, 불조선은 요동반도, 말조선은 압록강 이남이라 하였다. 대국(大國)을 대국으로 써야 하지, 소국(小國)으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大고조선 영토관의 출발이었다. 신채호는 앞서 1908년 쓴  『독사신론』에서도 단군의 강역은 심양(길림성), 요동(봉천성), 조선본부(조선반도)라 하였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좌파의 입장에서는 항일투쟁의 신채호보다 친일행적이 있더라도 소(小)고조선을 말한 식민사학자들을 동지로 받아들였다. 항일이냐 친일이냐로 적과 동지를 구별하기보다는 대고조선이냐 소고조선이냐로 적과 동지도 구별했다. 역사학자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이념에 빠질 때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역사 파탄’이었다. 해방 이후애도 이런 관점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만길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강만길의 말대로 똑똑을 자처했던 일부 진보학자들은 자기네 표현처럼 ‘일본 어용사학자’들이 한국사를 난도질하는 것을 보고서도, 저지하기보다는 도리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해방 후 한국사의 불행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1999년판)의 서론에서 “현대의 한국사학은 일제 어용사가들의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타파하는 한편, 한국학자들 자신이 쌓아올린 근대사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성장하였다”며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악조건 밑에서도 한국의 사학자들은 올바른 한국 사학을 키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렇게 해서 성립된 여러 학파를 크게 정리한다면 민족주의 사학, 유물사관, 그리고 실증사학의 셋이라 할 수가 있다”(5쪽)고 역시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어느 학파인가에 대해 분명한 설명이 없이 식민사학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두루뭉술한 어법으로 얼버무린다. 마치 본인은 식민주의 사학에 초연한 것처럼 유체이탈의 화법을 사용한다. 이 유체이탈의 화법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불통(不通)의 화법이다. 엉뚱하게도 서론 끝 부분에 “민족적인 입장에서 실증을 통하여 얻어진”이라는 문맥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본인은 ‘민족적 실증사학자’로 불리기를 원한 것 같다.

그러나 이기백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타파하였다는 스스로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정작 식민사관을 타파한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단군 부정과 고조선 강역의 축소’, ‘위만조선의 고조선 계승설’과 ‘한사군의 한반도 내재설’ 등 인데, 과연 그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이병도 이래 우리 민족사의 심장에 대못을 박은 것이 이 세 개의 독침인데, 이기백은 이를 얼마나 극복하였다는 말인가?

신채호의 大고조선 vs 하야시·이병도·이기백의 小고조선

이기백은 기존의 대동강 중심설에 겨우 요하 유역일대를 고조선의 영역에 마지못해 추가로 포함시킨 것 외에 여전히 위만조선과 그 자리에 들어선 한사군은 대동강 유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는 ‘고조선 지도’ 하나 자신 있게 그리지 못했다. 고조선 지도는 총독부가 가장 싫어하는 지도이다. 역사학자가 고조선 지도 하나 못 그렸다는 것은 식민사학에 빠져 있다는 반증이다. 그가 마지못해 그린 위만조선의 지도 한 장이 ‘고조선 지도’인 양 행세했다. 그의 위만조선 지도는 조선총독부와 이병도의 복사판에 불과했다.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1976)에 위만 지도를 고조선 지도(69쪽)인 것처럼 바꾸어 실었다.

이병도의 위만조선 지도(왼쪽)와 이기백의 위만조선 지도. 이병도는 위만조선을 위만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이라고 적어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것처럼 왜곡했다. 필자가 ‘위만조선’이라고 붉은 색으로 표시했다. (사진 편집 / 이찬구 기자)
이병도의 위만조선 지도(왼쪽)와 이기백의 위만조선 지도. 이병도는 위만조선을 위만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이라고 적어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것처럼 왜곡했다. 필자가 ‘위만조선’이라고 붉은 색으로 표시했다. (사진 편집 / 이찬구 기자)

이병도는 서울대 논문집에 투고한 「위씨조선흥망고」(1956)에서 위만(衛滿)이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연(燕)나라 장수 위만(衛滿)이 조선에 입국할 때 추결만이복(椎結蠻夷服)을 하였다”고 한 기록을 근거로 “추결만이복은 확실히 조선식의 결발(상투)과 의복을 지칭한 것임은 더 말한 것도 없다”(15쪽)고 단언했다. 사마천이 당시 만이(蠻夷)와 동이(東夷)도 구별 못 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병도는 어설픈 해석으로 연(燕)나라 사람 위만을 조선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이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만을 반란(叛亂)을 일으킨 자로 보았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족(異族)의 입구자(入寇者)니, 이 어찌 우리 역대(歷代)에 들어오리오”라 하여 도적의 무리가 일으킨 정권이니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위만을 떠돌이 도적 떼(流賊)로 본 것은 『북부여기』인데, 이병도는 이런 민족사학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로 위만과 한사군을 우상화했다. 이병도는 일본 식민지뿐만 아니라 중국 식민지까지도 옹호한 ‘식민지 유일론자’였다.

특히 이기백은 고조선의 강대함을 강역으로 설명하지 않고, 연(燕)나라 사람의 말인 “고조선 사람은 교만하고 잔인하다”(31쪽)는 말을 인용하여 “고조선의 군사력이 강하다”고 운운 하였는데, 이 말은 민족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또 한(漢)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치적 자유를 고조선인들은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말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은연히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이는 한사군을 고조선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망언이다.

어느 날 이병도는 이기백과의 대담(『역사가의 유향』)에서 “이교수(이기백)와 김교수(김철준)가 내 뒤를 이은 셈이지”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이기백은 이병도가 말한 것과 같이 이병도의 고대사, 즉 조선총독부의 고대사관을 철저하게 계승하였을 뿐이지 극복한 적이 없었다. 이기백도 『민족과 역사』(1971)에서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사학’에 대해 “객관적인 타당성보다는 주관적인 신념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28쪽)고 진보진영보다 앞서 비판함으로써 식민사학과 진보진영이 묘한 동거를 일찍부터 암시했다.

이처럼 신채호의 대고조선론에 반대되는 소고조선론은 가깝게는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경계로 하며...조그마한 나라로서 동양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강대국들이 다툼을 벌이는 요충지...(고조선은) 북부 평안도 지역에 이미 주민이 거주했다”라고 설명하고, 이어 “단군은 황당(荒唐)한 이야기”라고 왜곡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주류학자들이 말하는 소고조선론의 근원이다.

이를 충실히 계승한 자가 이병도이다. 그는 하야시처럼 우리 고대사를 크게 한사군 설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보았고, 실질적인 나라를 위만조선부터 인정했다. 이어 이병도는 고조선에 대해 “고조선의 중심지역은 서북해안지대인 대동강유역(평양)”이라고 못 박았다. 이처럼 압록강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대동강변에 철저하게 가두었다. 이것이 이병도의 ‘소고조선론’이다. 윤내현이 밝힌 대고조선의 100분의 1도 안 된다. 차라리 ‘극미(極微) 고조선’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반면에 이들 중에 군계일학처럼 나타난 학자가 서울대 교수 김용섭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김용섭은 자서전인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2011년)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소속이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를 들락거린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 바 있고, 김철준으로부터 “김선생(김용섭)의 민족주의는 내(김철준)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770쪽)라는 비아냥도 들을 정도였다. 그는 신채호의 역사연구에 대해, “그(신채호)는 우리의 역사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거나를 가리지 아니하고, 최소한 우리나라를 주체로 하고, 우리의 역사 사실을 충실히 서술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621쪽)고 말해 강만길, 이기백과는 다른 주체적 시각을 보였다.

또 김용섭은 한국사학의 과제에 대해, “왜곡된 사실의 부분적인 시정(是正)이, 한국사의 정당한 인식을 가능케 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한 위에서, 새로운 한국사관의 수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 문제를 설정하는 데서 가치관을 달리해야 한다”(536~537쪽)고 피력했다. 뼈대는 그대로 두고 살점을 몇 군데 붙이고 떼어냈다고 해서 새로운 한국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통렬한 지적이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사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쓰였기 때문에 한국사의 신론(新論)이라 할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친일 조선사의 복사본 중에 겉만 화려한 칼라 복사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강단사학계의 공통점은 고조선의 ‘넓은 영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두려움은 이병도의 뒤를 이은 이기백으로부터 노골화 되었다. 이기백은 1981년 11월, 국회 진술에서 “영토가 넓으면 위대하고, 영토가 좁으면 열등하다고 하는 식으로 국사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한국사상의 재구성』, 36쪽)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반도사관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가 그 반대의 사관을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뻔뻔한 주장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없었던 영토를 과장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고대 사료에 거듭 나타나는 고조선의 넓은 강역을 사료대로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일제 식민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인지 그 자가당착의 논법에 기가 찰 일이다. 그러면 이기백은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소고조선론을 말한 것인가?

윤내현의 「기자신고」 등장, 이병도·스에마쓰의 사망, 일본 극우의 충격

한배달 박정학의 증언에 의하면, 1980년대초 단국대 교수 윤내현의 「기자신고(箕子新考)」 학술발표회장에서 김철◯이 “영토가 넓으면 다 좋은 것인 줄 아느냐? 젊은 사람이 예의도 없다”고 책상을 치며 윤내현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김철◯도 이병도의 후예답게 축소지향의 반도사관론자이다. 이때의 상황을 윤내현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내 결론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기자는 중국으로부터 고조선 서쪽 변경으로 이주해온 실제 인물이며, 그가 고조선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자치국가 형태의 소국(小國)을 유지했다고 본다. 학술 발표회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더니 원로 선배 사학자들이 막 화를 냈다. 영토만 넓어서 뭐 할 거냐고.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사료의 문제, 역사 연구의 문제였는데 말이다. 그 이후 자주 어울렸던 많은 분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윤내현이 이상해졌다’라고 학술 모임에도 부르지 않았다. 주류사학계로부터 멀어졌다”(교수신문 2012. 9.25)

윤내현의 새 논문인 「기자신고」 발표는 가히 한국 사학계의 폭풍이었다. 윤내현은 신채호도, 리지린도 밝히지 못한 기자(箕子)의 정체(正體)를 찾아냈다. 김상태는 이 논문을 “기자는 조작이 아니며, 그렇다고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도 아니었다. 기자는 고조선의 서부 지역에 실제로 존재했던 고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고조선의 역사를 구성하는데 확고한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518쪽)

윤내현이 발표한 「기자신고」의 결론을 다시 요약하면, ‘기자조선’이라는 국명은 틀린 말이고, 고조선의 변방 거수국으로서 고조선의 200분의 1 크기 정도의 소국인 ‘기자국(箕子國)’이라 명명하였고, 이어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기자조선이 아니라 기자국인 것이다. 

윤내현이 「기자신고」라는 명논문을 발표한 뒤인 1986년, 이  「기자신고」를 비롯하여 고조선, 기자국, 위만, 한사군 관련논문을 하나로 엮은 『한국고대사신론』(일지사)을 출간하자, 강단사학계는 난리가 났다. 이병도 천하에서 이병도의 힘만 바라보고 노예의 학문에 익숙해 있던 이들은 무척 당황했다. 이에 이기백 등은 강력 대응하기 위해 1987년에 <한국사 시민강좌>라는 이름의 학술지를 창간하고, 이어 1988년에 이기백 「고조선의 국가형성」,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목적은 ‘윤내현 죽이기’였다.

윤내현의 대고조선에 충격받은 일본 극우

이즈음 일본 극우는 어떠했을까? 일본 극우도 윤내현의 발표내용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시절 이병도 신석호와 함께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에 난도질을 한 스에마쓰가 해방 후에도 한국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서울대학교를 왕래하며 열심히 현장지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100년’의 아성이 한 학자의 도전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스에마쓰는 경상도, 전라도를 왜(倭)가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거짓으로 꾸민 장본인으로 지금도 한국학자들은 그의 학설을 성경처럼 떠받들고 있다. 그도 1992년에 사망했다.

이기백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고조선은 건국의 연대가 오래고, 또 건국초기부터 방대한 영토를 지닌 존재였다”는 말을 한 윤내현을 빗대어 놓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고조선의 ‘실상(實像)이지 결코 그 허상(虛像)’이 아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실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만이 참말로 우리 민족의 영예를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실상은 드러나고, 허상은 깨져야 한다. 하지만 이기백은 윤내현을 향해 고조선의 넓은 영토가 틀렸다며 그것을 허상이라고 우겼다. 과연 그런 말할 자격이 있을까? 정작 누구의 말이 실상이며 누구의 말이 허상인가?

대(大)고조선의 완성자 윤내현에 적수가 못된 이기백·서영수

이어 서영수는 윤내현의 영토관을 요약하여 “윤내현은 고조선의 강역은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쪽으로는 난하, 남쪽으로는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의 남북 만주(滿洲) 전부와 한반도 북부에 걸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이런 결과만을 보면, 고조선은 확대되고, 종래의 수치(羞恥)로 생각되었던 낙랑군 등 한사군이 한국사의 주류에서 제외되어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그(윤내현)의 이러한 견해는 연구를 도출한 사료해석에 비약이 심한 것으로 보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이기백, 서영수는 윤내현의 대(大)고조선을 인정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연구 결과를 비약이 심한 문제 있는 연구물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이기백 서영수의 주장은 변명이고, 궤변이었다. 윤내현은 만주와 요서,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조선의 넓은 영토를 밝혔고, 아울러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일개 거수국(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한사군이 북경쪽 요서(遼西)에 있었다는 것을 중국의 방대한 고대 사료를 가지고 사실로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윤 교수의 대고조선 강역설과 위만조선의 거수국설을 꺾을 강단사학계의 제대로 된 반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병도 바라기 식민사학 군단은 윤내현 1인에 완패를 당했다.

윤내현이  『고조선연구』(1994년, 356쪽)에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조선 강역과 고조선 도읍지 지도. (사진 편집 / 이찬구 기자)
윤내현이  『고조선연구』(1994년, 356쪽)에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조선 강역과 고조선 도읍지 지도. (사진 편집 / 이찬구 기자)

이처럼 「기자신고」 이후 강단사학계가 벌벌 떨고 있는 동안에 이병도도 1989년에 8월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윤내현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1994년에 『고조선연구』(일지사)를 출간하여 다시 한번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고, 이병도의 위만조선 지도가 고조선을 대신하던 때에 윤내현은 독자적인 ‘고조선 강역도’를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그는 학문의 진실성에 대해 고백했고, 그 어떤 허구적 재구성도 없다고 천명했다.

“고조선을 바르게 복원하고 보면 만주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이 한국사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하고 있었던 국가였고, 고조선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한(韓) 등은 모두가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이었던 세력들이 독립하여 세운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시 필자가 한국사의 영역을 만주까지 확대하기 위하여 그러한 의도에 맞추어 고조선을 재구성하였을 것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문연구는 진실 되어야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앞에서 한 말로써 대답을 대신하겠다. 그리고 만약 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조선을 재구성했다면 그것은 역사왜곡으로서, 역사학자로서 큰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윤내현의 『고조선연구』 만권당 판본 상권 20쪽)

만주, 요서 난하, 한반도를 아우른 大고조선에서 민족의식 형성

그리고 윤 교수는 겨레얼 초청 강연을 통해 “고조선 초기부터 청동기 시대였죠. 청동기 시대는 대개 국가다. 그런 일반론에 따르면 고조선은 초기부터 국가 단계의 사회입니다. 건국되면서부터. 우리민족이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살다가 만주, 한반도 사람들이 그러다가 국가를 건설했다. 그래서 민족이 출현한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영토가 문젠데. 저는 영토가 만주, 난하 요서 서부에 난하유역, 갈석산이 있고, 거기까지가 고조선의 경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고조선의 백성으로서 같은 정치공동체, 문화공동체 이루며 살면서 귀속의식을 가졌던거죠”라며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와 요서와 한반도 전역이라고 밝히고,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민족이라는 귀속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신채호가 100년 전에 제기한 대고조선론을 매장시켰던 저들이 다시 야합한 음모의 칼 끝이 이제는 윤내현을 향하였다. 윤내현을 삼키려고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왔다. 해방 이후 부활한 저들은 끝내 ‘간첩 윤내현’을 만들어 갔다. 저들의 거대한 음모를 홀로 감당할 수 없었을까. 85세인 그는 지금도 모 병원에 누워 있다. 국민적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참고문헌>

신채호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윤내현 고조선연구, 한국고대사신론/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이기백 한국사신론/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김상태 고조선과 21세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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