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들, 계획만 세우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무지와 오만으로 일관
소련 중국 등 ‘통제와 억압으로 가난한 평등사회’ 구축하고 수천만 명 굶겨 죽였다
스탈린의 딸의 고백 “책으로 배우면 공사주의자 되고, 몸으로 배우면 반공주의자 된다”
사회주의 화장발에 속지 말고 사회주의의 비참한 역사를 검증잣대로 삼아야

‘젊고 섹시하고 쿨하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1982~2000년 출생)가 사회주의에 갖는 이미지다. 지난해 8월 갤럽이 18~29세 미국 젊은이에게 물었더니 51%가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불평등과 사회양극화는 자본주의가 낳은 해악’이라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선전 선동이 미국사회에서 크게 먹혔다는 의미다. 미국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라는 단어에서 ‘스탈린의 소련이나 카스트로의 쿠바가 아니라, 북유럽 복지국가나 멋쟁이 진보 지식인’을 떠올린다고 한다.

‘잠을 자거나 딴 책을 보거나 친구들과 떠든다.’ 중국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회주의 이념’ 수업시간의 모습이다. 중국은 정부가 여론을 통제하므로 젊은이들의 생각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여론조사는 없다. 다만 중국 젊은이들은 ‘집단이 먼저고 개인은 나중’이라는 중국 정부의 사상교육에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정치제도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더 크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대표 국가인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저평가를 당하고 친(親)자본주의이지만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키려는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배척받는 현상.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에서도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성향이 뭐가 나쁜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사회주의도 나쁘지 않다’는 자신에 대해 ‘나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의 장밋빛 환상만 보면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다음 문장을 금과옥조로 삼았으면 좋겠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 (스메틀라나 알릴루예바, 스탈린의 딸) 그녀는 자신도 아버지가 잘하는 줄 알고 침묵했다며, 아버지의 모든 과오를 안고 여생을 속죄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를 미화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로 ‘자본주의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유발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불평등이 본격화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동서고금의 과거 역사에서 불평등은 훨씬 심했다. 부(富)를 누리는 사람은 왕과 왕 주변의 권력계급, 그리고 극소수의 귀족계급(조선에서 양반계급)뿐이었다. 상위 0.1% 혹은 0.01%만 부를 누렸고 나머지는 모두 빈곤했다.

불평등이 완화된 적이 있었다. 미국 스탠포드대의 역사학자인 발터 샤이델은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ler)>란 책에서 “수천 년 동안 불평등이 심화하거나 높은 상태에서 유지되다가, 그 간극이 줄어드는 짧은 역동적인 시기가 가끔 있었다. 1914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60~70년의 기간에 부유한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모두 역사적으로 가장 격동적으로 빈부격차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중산층의 증가를 통해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부유층의 제거를 통해 빈부격차가 감소했다.

샤이델 교수는 역사상 불평등을 장기간에 걸쳐 줄인 요인으로 네 가지 재앙을 꼽았다. 무자비한 전쟁, 사회주의 혁명, 대규모 전염병, 국가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태가 평등사회를 만들었다는 얘기인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거나 사람들의 합의를 이룰 수 없다는 데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사회주의 혁명’이 이뤄낸 ‘평등사회’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평등사회는 빈곤과 억압이 어우러진 하향 평등사회였다.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권력계층은 온갖 부와 사치를 누렸다. 조지 오웰의 저서 <동물농장>에 나온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권력층)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가 실현된 곳이 사회주의체제였다.)

사회주의 혁명은 어떻게 ‘가난의 평등화’라는 비극을 초래했을까. 경제는 삶이고 현실 그 자체다. 수많은 계획과 이론도 결코 경제 현실의 아주 일부분마저 제대로 설명하거나 소화시킬 수 없다. 사회주의들은 이러한 경제의 본질을 전혀 모르면서도 자신들이 모든 걸 알고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지적인 오만’을 보였다. 소련의 집단농장, 중국의 대약진운동, 아프리카 국가들인 탄자니아 에티오피아의 강제촌락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북한이나 캄보디아 등은 열거할 가치도 없을 정도다.

소련을 탄생시킨 레닌은 경제를 하나의 잘 조직화된 기계로 인식했다. 중앙정부에 의해 규정된 품질과 양을 생산하면 경제는 잘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농촌에서 부농을 척결하고 농업의 집단화를 추구했다. 결과는 농업생산량이 50% 가량 줄어드는 비극이었다. 밀 호밀 보리 옥수수 등 씨만 뿌리면 수확까지 별 노력이 필요하지 않는 작물도 있었던 반면, 과일 채소 가축 꽃 등은 세심한 손길과 창의성이 필요했는데 농민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집단화를 꾀했다. 일인당 곡물 생산량은 1957년부터 1962년까지 21% 감소했고, 수산물 생산량은 31% 줄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약 45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정확한 통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좌파 지식인의 대부로 알려진 리영희 교수는 문화혁명을 ‘인류의 위대한 실험’인양 찬미했다. 문화혁명 속의 중국을 “배우며 일하고, 일하며 배우는 나라”로 미화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리영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우자마아 촌락 캠페인>을 통해 최고 500만 명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새로운 촌락의 60%는 영구적인 경작이 힘든 반건조지대에 있었고,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러 먼 거리를 이동해야했다.

사회주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국민을 다루는 법을 안다고 착각했다. 탄자니아의 니에레레는 ‘농민은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권력을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 ‘상부에 정책이 있으면 하부에 대책이 있다.(上部有政策, 下部有?策)’라는 표현이 있는데, 일반 국민들이 공산당에서 쏟아내는 각종 정책을 비웃는 얘기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의 권력에 대한 대처방안은 ‘척하기’이다. 권력이 윽박지르면 복종하는 척하고, 약속하면 믿는 척하고, 경제가 좋다고 하면 맞는 척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절을 보냈던 소련과 동유럽의 역사는 ‘지배층은 배급을 주는 척했고, 국민들은 일하는 척 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결과는 권력의 패배였다.

중국에서 정치권력은 공산당이 쥐고 있지만 경제체제는 시장경제다. 중국이 덩샤오핑 시대를 맞아 시장경제가 도입됐을 때 일화가 있다. 스웨덴의 경제역사학자 요한 노버그는 중국 농촌과 관련해 “농민들은 마을 호루라기 소리가 울릴 때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일찍 나가서 일을 시작했고,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1979년의 곡물 생산량은 전년의 6배였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독립과 자율성을 빼앗긴 개인은 기본적으로 ‘자유가 없는 노동자’가 된다. 자유가 없고 소유권마저 없는 노동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늑장과 게으름, 그리고 불성실’로 일관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사회주의자들 혹은 ‘국가주도’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성향 지식인들은 “문제는 무지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무지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만 지적할 뿐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가져온 비극은 애써 외면한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게 사회주의 성향을 보인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현 주중 대사)은 “우리 경제의 누적된 모순을 시장경제가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듣도 보도 못한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였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과거 공정위원장 시절 5대 그룹 대표들과 만난 뒤 진행된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재벌들 혼내주고 왔다”고 발언해 구설에 올랐다. 김상조 실장 스스로 경제에 대해 기업 인사들보다 훨씬 잘 안다는 ‘지적 오만’을 갖고 있음을 내비쳤다.

사회주의가 인류 역사에서 크나큰 비극을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회주의는 현실 세계에서 ‘법 앞의 평등, 만인을 위한 시민의 권리, 생존권 건강권 주거권 교육권 등’ 언뜻 보기에 평등주의적이고 조화로운 언어로 사회주의 자체의 나쁜 본질을 숨기기 때문이다. 화장발로 모두를 속인다는 의미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경제 발전의 혜택을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몸으로 경험하지 못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에 사는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서구사회 젊은이들은 역사적 비극을 만든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이 ‘역사의 대역죄인’이란 사실도 거의 모른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민은 ‘역사가 곧 팩트(사실)이고, 역사가 검증잣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이다.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외쳤지만 여전히 실현은 멀기만 한데, 사회주의를 폐기한 중국에서는 진즉 ‘이밥에 고깃국’이 실현됐다. (참, 북한에서도 이밥과 고깃국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김일성 후손들과 그 주변 권력층 등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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