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소송 1심서 ING생명 패소…“잘못 작성된 약관 위험은 보험사 부담”

▲ 지난해 ING생명이 금융당국의 자살보험금 미지급 관련 제재 조치에 반기를 들고 제기했던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 / 시사포커스DB
생명 보험에 가입한 가입자가 자살하면 보험금을 줘야 할까. 물론 상식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일 것이나 실제 자살하면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약관에 들어있던 상품을 판매한 보험사들이 상당수 있다. 지금까지 미지급된 금액만 2000억원이 넘는다. 금융당국은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보험사들에게 제재를 내렸고, 한 보험사가 대표해 금융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첫 판결이 1년여 만에 내려졌다.
 

지난해 ING생명이 금융당국의 자살보험금 미지급 관련 제재 조치에 반기를 들고 제기했던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13일 서울행정법원은 ING생명이 금융위 및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과징금 부과처분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현재 보험사와 개별 계약자 간에 100여 건에 달하는 민사소송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행정소송의 결과는 많은 소송들의 참고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반인들로서는 잘못 작성됐다고 알 수 없어”
이날 재판부는 대체적으로 자살보험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 쟁점인 약관상 오류에 대한 판단 여부에 대해 잘못 작성된 약관이라 효력이 없다는 보험사들의 주장을 채택하지 않고 금융당국과 일반 보험계약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생보사들이 2001년 5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판매했던 생명보험의 재해사망특약 약관은 2010년 4월 개정되기 전까지 자살에 대해 보험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핵심 쟁점이 돼 왔다.
 
우선 해당 약관을 살펴보면 ‘12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보험사고’ 항목에는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나열돼 있다. 여기에 붙은 단서 조항이 문제가 됐는데 바로 ‘특약의 책임 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쳐 장애등급 1급이 된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즉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하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지 아니하다’ 즉, 지급한다는 얘기다.
 
보험사들이 자살이 재해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약관 문구가 이렇게 돼 있더라도 이는 무시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약관의 재해 분류표에도 자살은 포함돼 있지도 않았고, 금융당국은 물론 고객들에게도 자살은 재해사망이 아니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이 되느냐는 얘기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보험사들은 2010년 부랴부랴 약관을 개정했지만 이미 6~7년 간 보험에 가입한 고객들의 숫자는 크게 불어나 있었다.
 
반면 고객들은 길고 긴 약관에 숨어있는 불리한 조항까지 악착같이 이용하는 보험사들이 정작 본인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무시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소비자 권리 보호 차원에서 약관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지급을 권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금융당국 및 고객들의 손을 들어줬다. 일반인들로서는 이 조항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문구 그대로 보장되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재판부는 잘못 작성된 약관에 대한 위험은 보험사가 부담하는 것이 맞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또한 금융당국이 그간 이를 문제삼지 않다가 갑자기 과징금을 부과한 것은 신뢰보호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ING생명 측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예전에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금융당국이 적극적인 견해를 표명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소멸시효 지난 부분에 대한 제재도 정당”
 
▲ 서울행정법원은 ING생명이 금융위 및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과징금 부과처분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날 재판부는 금융당국과 일반 보험계약자들의 주장을 대체적으로 그대로 수용했다. ⓒ뉴시스
소멸시효에 관한 부분도 재판부는 금융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재판부는 소멸시효 제도는 개인 간의 거래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라며 금융당국이 소멸시효가 지난 부분에 대해 제재를 내린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일반적으로 보험금 청구권은 지급 사유가 발생된 2년 내로만 행사할 수 있었다. 지급 사유가 발생하고 2년이 지나서 신청을 하면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참고로 올해 3월부터는 3년 내로다.
 
하지만 재판부는 금융당국의 제재와 소멸시효 완성 여부는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즉, 이미 자살보험금 지급 대상자들의 소멸시효가 지난 건을 모두 포함해 내린 제재는 정당하다는 얘기다.
 
물론 이 소송은 금융당국의 제재를 놓고 다투는 행정소송이지 보험금 청구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벌이는 소송이 아니기에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청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판단은 별개다.
 
소멸시효와 관련한 다른 민사소송들의 결과는 혼전 양상이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반 계약자와 보험사가 벌인 민사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 하더라도 약관의 이해와 해석이 애매해서 유족들의 보험금 청구권 행사가 제약됐으므로 보험사들의 이 같은 주장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해석한 바 있다.
 
하지만 앞서 인천지방법원은 같은 쟁점의 소송에서 소멸시효 기간이 완성됐으니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시했다. 올해 판결이 난 청구권 소멸시효 관련 소송의 결과는 2:2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따르면 소멸시효가 완료된 자살보험금의 규모는 10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은 많은 고객들은 자살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대상인지 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각 재판부가 약관의 효력을 인정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각 소송에서 다른 결과가 나오고 있다.
 
◆100여 건의 민사소송 영향 받나
한편 자살보험금 논란은 2013년 금감원의 종합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8월 금감원은 ING생명을 종합감사한 뒤 ING생명이 재해사망특약 2년 후 자살한 90여건에 대해 200억원의 보험금(2003~2010년)을 미지급한 사실을 확인해 논란이 시작됐다.
 
금융당국은 자살한 가입자의 유가족에게 약관대로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생보사들은 일반사망 보험금만 지급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재해사망 보험금은 일반사망 보험금보다 2~3배에서 많게는 5배까지도 더 많다.
 
금융당국이 ING생명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다른 생명보험사들에게도 보험금 지급을 권고하면서 보험사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ING생명 뿐 아니라 빅3 생보사(삼성·교보·한화생명)를 포함한 17개 생보사가 줄줄이 미지급 자살보험금 사태에 엮인 상태다. 8개 생보사(동양·KB·IBK·푸르덴셜·라이나·카디프생명, 교보라이프플래닛)는 해당 문구를 채용하지 않아 이 같은 논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해당 기간 동안 자살보험금 지급 관련 약관이 포함된 상품은 총 282만 건이나 팔렸다. 지난해 4월 기준으로 17개 보험사가 소급해서 지급해야 할 자살보험금은 2179억원에 달한다. 이 중 ING생명이 가장 많고(471건·653억원), 삼성생명(713건·563억원), 교보생명(308건·223억원) 등의 순이다. 지연이자가 포함되면 이 금액은 더욱 불어난다. 추후 자살 건수가 늘어나면 지급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다.
 
현재 전국에서 이와 관련해 보험사와 일반 계약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송만 100건에 육박하고 있다. 또한 재판부에 따라 약관의 효력 인정 여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등 결과도 천차만별이다. 이에 이번 행정소송 결과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국의 민사소송 결과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지 귀추가 주목된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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