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먹으며 치는 장난, 반쪽 짜리 재미

예술가라면 누구든 '변신'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마련이고, 그 시점이란 대개 '한 스타일 내에서 최정점에 이르고 난 후'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설정되곤 한다. 자신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이미 <펄프 픽션>으로 동일 스타일 내에서 최정점에 이르렀다 판단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킬 빌 Vol. 1>은, 분명 '잘 다듬어진 변화'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엿보임에도 그 변화방식에 있어서 몇 가지 논란점을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등장했다. <킬 빌 Vol. 1>이 여타 타란티노 작품들과 구분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라면, 다분히 정적이었던 타란티노 영화 구조를 완전히 뒤엎고 과도할 정도로 동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기존의 타란티노 영화는 '인물'과 그 인물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대사'들의 향연이었다. 플롯의 진행을 늦추거나 혹은 아예 끊고서라도 그 많은 대사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넣던 그의 스타일은 한 시대를 풍미했을 만치 매혹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것이었는데, <킬 빌 Vol. 1>에는 놀랍게도 대사 자체가 별로 없고, 오직 동적인 액션, 그것도 대하 활극류의 어마어마한 액션씬들이 빈 '대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 2부로 나뉘어진 형식이기에 발생한 일인 듯도 싶지만, 실제로 <킬 빌 Vol. 1>은 기본적인 인물설정조차도 희미하다. 흥미를 가하기 위해 등장한 '복수대상'의 과거사는 나올지언정, 정작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고,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조차도 장난스런 방식으로 '지워'버리고 있다. 그러나, 대신 삽입된 화려한 액션 씬들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요란스런 색치장과 짧고 광적인 컷으로 유명한 로버트 리차드슨의 촬영은 현란하기 그지없고, 이를 이어붙인 편집방식 역시 재빠르고 과감하며 형식파괴적이다. 타란티노의 영화라기 보다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수많은 '비쥬얼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가깝다고까지 여겨지는 <킬 빌 Vol. 1>은, 이 정도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음에도 구조적인 연출 면에서 보았을 때 충분한 완성도를 지녀 일단 놀라움을 사고, 과연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을 법한 '완성된 변신'이라는 느낌이 들어, 무책임한 실험들로 가득찬 '거장의 변신' 궤도에 제동을 걸 모범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킬 빌 Vol. 1>에는 달라진 면모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워 하고, 겸연쩍어 하는 모습 또한 엿보여 실망감이 인다. 이전의 타란티노 영화들은 광적인 엔터테인먼트로 보이면서도 지적인 성찰이 가능한 절묘한 '지성'과 '반지성'의 '혼합체'였다. 하지만 <킬 빌 Vol. 1>은 완전히 'B급 엔터테인먼트'의 방향으로 설정되었기에 타란티노 특유의 사고와 깊이를 부여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란티노가 도입한 방식은 '이 모든 것이 농담'이라는 식의 자조성 유희였다. 이런 냉소적인 태도는 보는 이를 꾸준히 괴롭히는데, 타란티노가 그렇게도 집중해있는 B급 액션 영화들 - 미국과 홍콩, 일본 영화를 총망라한 - 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조소'의 입장을 반드시 집어넣고, 음악설정 역시 고의적으로 장난스럽게 배치시켜, 장르를 이용하면서도 진정으로 장르에 녹아들려 하지는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것은 만화입니다'라고 공표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의 삽입이나, 소니 치바와 주인공의 '이해할 수 없을 만치 길고 무의미한' 첫대면 등에서 그의 이런 얄팍한 의도가 여실히 보여지는데, 이렇게까지 '지성의 방어막'을 치고 난 뒤에야 장난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는 그의 자신감 부족은 그 근원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타란티노야말로 '장난으로서의 영화'라는 개념을 도입해 세기말의 세계영화계를 발칵 뒤집었던 장본인이 아닌가. 이런 혼란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B급 엔터테인먼트의 기본골격을 도입한 '변신'의 시작점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킬 빌 Vol. 1>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타란티노의 대담함과 소심함, 끈질김과 나약함이 동시에 엿보여지는 기묘한 케이스이며, '불완전한 걸작'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매력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고 넘어가는 '변화의 과도기'가 지나고 난 뒤, 빠르면 바로 다음 작품부터라도, 타란티노가 <킬 빌 Vol. 1>이 지닌 단점들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코 그에게 쏟아질 수많은 비판을 액면 그대로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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