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하나의 쟝르로서 확고히 자리잡은 '요리 만화'. 그 리더격 작품들을 살펴보자

일본만화 중에는 유난히 전문직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그것도 한국의 트렌디 드라마처럼 전문직이라는 직함만 내세우고 평이한 러브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러브 스토리 따위는 들러리이고 당 전문직 자체의 생리와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 주목적인 '정보성' 만화들이 많다. 우리 만화계에선 아직도 제대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 '전문직' 만화. 이번에는 그 중에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충격을 주고, 큰 유행을 일으켰던 '요리 만화'의 주역들을 살펴보며, 같은 '요리 만화' 쟝르 내에서도 어떤 갈래로 나뉘는지, 어떤 형식으로 소재를 다루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 요리 만화 열풍의 시발점 <미스터 초밥왕> 한국에 요리 만화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격 작품. 그 사회적 영향력도 엄청나서, 회전초밥집의 난립이 일기도 했고, 신라호텔에서는 이 책을 직원 필독도서로 꼽기까지 했다. 사실 만화 자체는 '배틀 모드' 코믹의 요리판 변형으로, 대결구도 자체도 어설프고 '너무 지나친' 맛의 묘사 탓에 조소에 가까운 컬트적 반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초밥이라는 요리 하나, 그것도 '밥 위에 날생선을 얹기만 하는 간단한 요리'라는 편견이 있는 요리로 수십권을 연재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국대회편'이라 이름 지어진 노골적인 배틀 모드로 또다시 십수권을 연재해, 초밥과 관련된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이 만화 속에 들어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 장수 중인 요리대백과 <맛의 달인> <맛의 달인>이야말로 '요리 만화' 쟝르의 결정체다. 한 신문사의 <완벽한 메뉴> 기획에 들어갈 기사거리를 찾는다는 내용으로 전세계의 모든 요리를 총망라해 그야말로 '완벽한 메뉴'들을 80여권이 넘는 분량 동안 꾸준히 연재하고 있다. 남녀 기자 사이의 오락가락 연애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 등, 드라마적인 요소들이 삽입되어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심은 매화마다 등장하는 요리 자체이고, 나머지 요소들 - 이야기 전개와 작화 형식까지 - 은 아예 '무시'해버린, 집중적인 '요리대백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원래 주인공 지로와 유우꼬가 결혼하는 45권에서 종결될 예정이었으나, 독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연재가 계속되고 있는 슬리퍼 히트작이다. ■ 프랑스 요리계의 '로닌' <셰프> 동양 특유의 서양 문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더해져 일본 내에서 큰 호응을 얻은 만화 <셰프>는, 주인 잃은 사무라이 '로닌' 풍의 '용병' 프랑스 요리사가 등장해 거액의 돈을 받고 엄청난 퀄리티의 프랑스 요리를 내놓아 여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풀어낸다는, 배틀 모드가 아니면서도 어딘지 대결 구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 이야기 자체는 조잡하고 등장하는 요리들이 주가 되는 스타일인데, '불행한 과거를 지닌 신비스런 프랑스 요리사'라는 우스꽝스런 설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을 듯. 로마네 꽁띠를 비롯한 고급 명주들부터 시작해 푸와그라, 부야베스 등의 다양한 프랑스 요리와 그 조리비법 등이 소개된다. ■ 대사관저 요리사가 겪는 '요리 외교' <대사각하의 요리사> 주베트남 일본대사관의 요리사를 타이틀롤로 내세운 색다른 요리 만화로, '요리는 인간의 정서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입장과 '정치도 결국은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입장이 만나, '요리는 가장 정치적인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라는, 나름대로 대담하고 참신한 방향설정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원래 프랑스 요리사였던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그가 베트남에 와서 접하는 다양한 베트남 문화와 요리, 향신료의 세계가 프랑스 요리와 접목되는 퓨전 스타일 요리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드라마적 요소가 여타 요리 만화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고, 캐릭터 묘사도 풍부하고 섬세해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법한 만화다. ■ 라면 하나만으로도 장기 연재물이 나온다 <라면요리왕> <라면요리왕>은 두 가지 큰 컨셉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역시 '라면'이라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요리 소재 하나만으로도 장기 연재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정보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샐러리맨으로서 요리에 도전한다'라는 설정을 더해 실제 독자층인 샐러리맨들에게 '퇴직 후 비젼'을 제시해 주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처럼 인스턴트 중심의 라면이 아니라 직접 국물을 우려내서 만드는 생라면이어서 '요리'로서의 가치도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고, 라면의 역사와 새로운 퓨젼 라면의 탄생비화가 매회마다 소개되어 정보상의 가치 또한 지니고 있다. 드라마성도 안정되어 있고, 일반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큼 사실성도 상당부분 지니고 있어 요리 만화 특유의 '무자비하게 과장된' 묘사들이 빠지는 좋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 한국에서도 드디어 등장한 요리만화 <짜장면> 한국 최초의 본격 요리 만화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만화사에 씌어질 법한 기념비적 일인데, 작품의 퀄리티도 꽤 높은 편이어서 호감을 사고 있다. 무작정 상경한 '촌놈' 치얼과 조직 폭력배 출신 설기가 만나 '최고의 짜장면'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한데 뭉쳐 일궈내는 드라마는 한국 만화 특유의 '촌스런' 정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일본에서 넘어온 '전문직 만화'의 요점을 뽑아내 효율적으로 배합시켜 놓았다. 박하와 허영만, 김재연의 합작품이며, 중간에 그림작가가 교체되는 일을 겪기도 했지만 전 11권으로 '완간시키고야 마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이 밖에도 어시장 생선점의 이야기를 다룬 <어시장 삼대째>,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형식 만화 <불꽃의 요리사 주부덕>, 카레 요리사를 다룬 <화려한 식탁>, 가정 요리 중심으로 훈훈한 가정 드라마를 엮어낸 <아빠는 요리사> 등의 만화들이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요리의 개념에서 살짝 비껴나간, 레스토랑의 주류전문 어드바이저인 '소믈리에'를 다룬 만화까지 등장해, 요리에 얽힌 모든 관계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라면 만화, 중식 만화도 몇 가지씩 겹치는 현상까지 발생했는데, 추후 등장할 한국 요리 만화는 일본에서 전문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요리, 바로 '한국 특유의 음식'을 다루는 것이 포화상태의 요리 만화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결일 수도 있을 법하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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