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佛道)의 실천적 자비를 행하는 무량사 주지 덕운스님

일찍이 붓다는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함을 설(說)하였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어떤 사람이든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변모하는 세상을 두고 한 얘기다. 이처럼 사바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하는 속성을 갖는다.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한국 불교 역시 세월의 흐름 아래 수차례의 개혁 운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모습이나 양상이 변했다고는 해도 종교로서 갖는 근본 이념까지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증명해 보이듯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란 인간의 마음이라는 의식의 기재(器才)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몸소 자비를 행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스님이 있어 만나보았다.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계 최대 9m의 옥불상(玉佛像)을 건립하고 멀리 해외까지 나가 설법을 전하는 무량사(경남 창원시 북면 무곡리 소재) 주지 덕운스님을 통해 현재 한국 불교의 현황 및 그만의 독실한 종교 철학에 대해 들어 본다. ◆ 인간 속에 내재한 佛性을 깨우쳐 成佛에 이르게 함 종교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정신 자세와 보다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찾게 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종교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의 모든 문화와 가치가 그 영향을 받는다고 할 때, 인간 생활의 전반이 종교 신앙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이른바 비단길을 거쳐 중국과 우리 나라에 전해져 오면서, 동서 문화 교류의 중심을 이룬 중앙아시아 문화를 포용하여 현재 국제적인 문화 요소로 한데 얽힌 최고 수준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에, 오로지 ‘길’ 하나를 가르치는 석가모니의 뜻을 그대로 좇아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한 불성을 깨우침으로써 성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덕운스님은 지난 98년부터 현재까지 줄곧 무량사의 주지로 지내면서 전 신도들의 마음밭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 심성, 학문의 수양을 거쳐 실천의 수양으로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는 수양은 크게 심성의 수양, 학문의 수양, 실천의 수양으로 나눌 수 있다. 심성의 수양이란 마음의 본체를 밝히고 성품의 근원을 찾아보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말하며, 학문의 수양은 심성 수양의 한 방법론으로서 문자의 지식을 확충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수선(修禪)이 될 것인가를 연구하며 세속의 그것과는 다른 불교의 학문을 갈고 닦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고ㆍ집ㆍ멸ㆍ도의 사성제(四聖諦)를 비롯하여 12인연과 6바라밀에 대한 이치를 갈고 닦음으로써 인생의 근본 문제인 생사 해탈과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도리를 배우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배우지 않으면 도(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요, 인불학(人不學)이면 부지도(不知道)’의 실현인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성심과 학문의 수양에 이은 실천의 수양이다. 학문이니, 지식이니 하는 인생편력을 돕는 노정기(路程記)를 거친 후에는 반드시 만행(萬行)을 우선으로 하여 일체중생을 건지는 실천 수행이 뒤따라야 하며, 실천의 수양이 없다면 이전의 수양은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과 불우민, 또 장애우의 복리를 위해 애쓰는 덕운스님의 행보가 바로 실천적 수양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랜 수련 끝에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이웃을 돌보는 데까지 이른 덕운스님을 통해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을 찾아 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 依佛之敎, 佛陀之敎, 成佛之敎로 시작한 합리성, 평안성, 평화성의 집합체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역(西域) 즉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우리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의 창조적인 한국 불교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불교는 불교 문화권 중에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여 오늘날 ‘석탑의 나라’로서 그 입지를 굳혔으며, 부처님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데서 기원, 불교 자체가 지닌 깊은 종교적 사상을 표출한 불교 미술도 그에 한 몫 하였다. 불교는 통상 ‘의불지교(依佛之敎)’, ‘불타지교(佛陀之敎)’, ‘성불지교(成佛之敎)’로 표현된다. 이는 문자 그대로 부처님(佛)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된 가르침(敎)을 의미하며, 나아가 역사적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佛)에 의지(依)해서 이루어진, 또 부처(佛)가 되도록(成)하는 가르침을 일컫는다. 말하자면 3보(佛 ,法, 僧)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근래 들어 서구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퇴색하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언제나 합리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다니 의아할 지도 모르겠으나, 불교가 가진 평화성과 합리성, 또 평안성을 아는 이라면 그런 일련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불교의 현대적 정의와 그 맥을 같이 하는데, 불교의 현대적 정의란 첫째, 불교가 철저히 합리주의에 입각한 종교라는 것이다. 특수한 교리로써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독단을 배제한 불교의 사상이 이를 입증한다. 불교의 합리적 사고는 인간의 주체성 회복에 대하여 획기적 전환점을 제시하는데,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불교의 주장이 그것이며, 이는 신의 굴레에 매여 한시적인 인본주의에 매달리는 서구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는 평화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종교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고등 종교로서 무력을 빌리지 않고 세계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간 유일한 종교로서, 불교의 관용적 사상 체계는 모든 주의나 이념, 사상, 철학의 대립을 없애고 진정한 평화를 가능케 하는 처방으로 작용한다. 끝으로 불교는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종교임을 지나칠 수 없다. 불교에는 교세의 확장이나 신자들의 결속을 위한 종말론, 심판 등의 위협적 교리가 없다. 오히려 불안, 번민의 근원인 이기심과 욕망이 담긴 편견을 제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며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는 그 수행법도 가혹한 수련 혹은 특정인들에게나 가능할 듯한 특수 기법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비록 지금은 얼마간 그 빛이 흐려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한국 고유의 정서인 평안과 평화, 또 서구적인 합리성을 모두 추려놓은 집합체가 불교이니 이치를 따지기에 능한 서구인일지라도 한 번 접하고서야 마다할 리 있겠는가. ◆ 호국불교에서 조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통불교까지 석가모니에 의해 시작된 불교는 이후 새로운 논리, 철학, 행동 이념 위에서 급속히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B.C. 5세기 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에 전해졌으며,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4세기 경 우리 나라에 전래 되었다. 반도에 위치한 우리 나라는 대륙과 해로를 통하여 전해진 불교 사상과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이후 바다 건너 일본에 불법을 전파하기에 이른다. 삼국에서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불교는 조선 500년의 억불정책과 일제 식민지라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친 후,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정법화, 대중화, 현대화 되었다. 이러한 흐름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불교 역사의 특수성을 표현한 용어로 ‘호국불교’와 ‘통불교’가 있다. 전입 초기부터 정권과 상당히 밀착해 있었던 한국 불교는 고구려, 백제 모두 왕실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신라 역시 초기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쓴 왕실의 후원을 업고 수용되어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되었다. 신라의 경우 지역적으로 나뉘어 있던 토속적 종교 신앙, 조상신 신앙 등을, 보편적 이념을 내세우는 불교로 통합함으로써 전체적인 국력을 결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종교가 국가의 체제로 사용됨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볼 이도 없지 않겠으나, 신라 시대의 불국토 사상, 원광ㆍ자장의 국가 권력에의 봉사,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명랑의 문두루 비밀법, 의상이 당군의 침범을 알려주기 위하여 급거히 귀국하였다는 일련의 예가 그러한 비판을 일축하며, 오히려 이로써 불교가 국가 목적에 봉사하는 종교로 받아들여졌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또 한국 불교의 특성을 조화와 화해의 강조에서 찾는 일반적인 견해로 ‘통불교’를 들 수 있다. 물론 전래 초기에는 불교에 뚜렷한 종파가 없었으므로 다양한 불교 이론을 별다른 구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신라 통일 무렵에는 갈등의 해소에 대한 요청이 쇄도, 원효의 화쟁 이론이 대두하였고 이를 계기로 끊임없이 화해를 강조하는 불교의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 중생의 바른 삶을 위한 지침 - 三法印, 四聖諦, 八正道 신의 존재에 무관한 신비적 초월론으로서 불교는 한 마디로 ‘무신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를 꼽을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은 말 그대로 3가지 확실한 진리를 일컫는 말로서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현상계의 실재는 공간적으로 아무런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생사가 윤회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이상의 경지인 열반 정적의 진상을 강조함)을 가리키며 이 세 가지 법을 부처의 말씀과 마군(魔軍)의 말을 관장하는 인(印)으로 삼는다. 다음으로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도 그 정수(精髓)인 사성제(四聖諦)는 사진제(四眞諦) 또는 사제(四諦)라고도 하며, 실제적인 견지와 이론적인 견지에서 고난의 원인에 대해 규명(糾明)한 것이다. 이 때 제(諦-satya)는 진리·진실의 의미이며,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인 인(因)ㆍ과(果)를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조직으로 고제(苦諦-dubkha) ·집제(集諦-samudaya) ·멸제(滅諦-nirodha) ·도제(道諦-mārga)의 네 가지 진리를 가리킨다. 또 팔정도(八正道)는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실천수행 해야 하는 8가지 길 또는 그 방법을 말하는데, 이것은 원시불교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의 법으로서 석가의 근본 교설에 해당하는 중요한 교리이다. 여기서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의 덕목이란,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정근(正勤-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의 8가지를 말한다. ◆ 현대인의 약한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 참 종교의 역할 앞에서 말한 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스님이 된 계기에 대해서도 “그저 천직(天職)일 따름이지요.”라고 말하는 덕운스님은 스스로 행하는 다양한 복지 사업에 대한 주변의 칭송에도 종교인으로서 당연하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불교는 물론 천주교, 기독교 등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 된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실천하는 덕운스님의 행보에서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이전의 인사(人士)도 나름대로 이름에 걸맞는 봉사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덕운스님의 말은 그의 긍정적 사고관을 반영하는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를 헐뜯을 일이 있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 교화하여 이후 비방이 아닌 칭찬을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덕운스님의 가르침이 인상적이다. 불교는 곧 마음이라고 말하는 덕운스님은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어요.’하고 시작되는 동요는 현대인의 약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늘 내려주곤 하던 습관 때문에 스스로 내려올 줄 모르는 거지요. 현재 앉은 자리가 가시 방석이라면, 스스로 몸을 일으켜 비단 방석으로 옮겨 앉을 줄 아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넋 놓고 앉아 구원의 손길만 기다려서는 안 되는 거지요. 이 시대에서 바로 그 약한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며 불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의 실천 모든 종교는 마음이라는 의식의 기재(器才)를 가르치는 것이라며 “만물은 앞과 뒤를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며,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남녀나 밤낮이 그러하듯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善)과 악(惡) 사이에서 악을 선 쪽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이지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저것을 위해 이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덕운스님은 현재 국내 뿐만 아니라 멀리 해외(베트남 등지)까지 나가 설법을 전하고 불우민을 돕는 자비를 베풀면서도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이 정도 밖에’ 못하고 있다는 겸손함을 보였다.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와 같은 덕운스님의 행보에서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식사도 걸러 가며 직접 달마를 치거나 인근의 나무 등을 이용해 달마상을 조각, 창원 성산 아트홀에서 전시회를 연 덕운스님은 수익금을 모두 복지사업을 펼치는 데 쓰는 모범을 보였으며, 이에서 그치지 않고 “먹을 갈 힘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계속 복지를 위한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주위로부터 더없는 귀감이 되고 있다. 향후 계획 마저도 “시기 적절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신도들을 이끌며, 남는 시간을 모두 복지를 위한 일에 쓰고 싶습니다.”라고 밝히는 덕운스님은 복지 사업에 쓰이는 금원(金員) 마련을 위해 더욱 절약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며 먼 길을 떠나는 취재진을 위해 뜨거운 김이 나는 팥죽 한 그릇을 올린 소박한 상을 대접했다. 진심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며 내년에는 특히 장애우를 위한 복지에 힘쓰겠다는 덕운스님이 내놓은 팥죽. 과연 그보다 더 값진 음식이 있을까. 덕운스님의 따스한 마음이 가득 담긴 다디단 팥죽 한 그릇은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잠시 잊게 해 줄 뿐 아니라, 각박한 현대 사회 속에서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촉진제(促進劑)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먼 산사를 찾지 못하는 서민을 위해 직접 시장을 방문하여 상인을 위로하고, 찬 바람 부는 거리의 부랑자에게 따스한 밥 한 덩이를 아끼지 않으며, 혹여 옮을까 두려워 보통 사람은 근처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환우들의 두 손을 기꺼이 잡아주는 덕운스님. 생불(生佛)이란 그와 같은 스님을 두고 하는 말임을 의심치 않으며, 모든 중생이 그 따스한 가슴에 완연히 전도(傳道)될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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