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세력들, 10%만 남고 모두 등 돌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역경은 리더십의 부재가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는 스스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리더십을 거부하고 나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새로운 리더십을 구현해 내지도 못했다. 즉 대통령의 권한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된 반면 그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태산처럼 쌓여있다. 그는 3년 전 취임 당시 구체제의 청산돠 새로운 사회체계의 건설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청산은 과감한 개혁정책을 필요로 하는 반면 건설은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의 매끄럽고 세련된 조정이 요구되었다. 개혁의 청사진은 불분명했거나 미숙했음이 분명했다. 그 자신이 개혁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현실안주 사이를 넘나들었고 이해관계의 조정 면에서는 서툴고 거칠었다. 그래서 독선적이라는 비난도 나왔던 것. 결국 개혁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노사정 대타협과 같은 새로운 발전모델의 구축은 착수조차 못했으며 지지자들은 대거 등을 돌렸다. 그의 위기는 이런 리더십 부재에 따른 정치적 고행이다. 침몰직전의 난파선을 연상케 하는 그는 현재의 정치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어떤 수를 던져야 할 것인가? 그가 현재의 정치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국정운영에 대한 냉정한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우선 지지층의 이탈 원인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그의 지지세력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냉소와 무관심만이 너울거린다. 이들은 그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는 과연 개혁을 추구했던 것인가. 그에게 개혁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던 것인가. 그가 그렸던 사회가 내가 원하는 사회였던가. 그의 연정 상대는 당연히 이들이어야 했다. 그게 도덕적으로도 타당하고 시대의 흐름과 부합된다. 열린우리당의 지지기반은 이런 사람들의 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10% 정도만 남았다. 개혁적 진보세력의 특징은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구성원의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시민사회의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한국사회의 개혁 아젠다(의제)를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정당의 위상은 위축됐다. 정당은 이제 더 이상 사회개혁의 주체로서 자격을 상실했다. 시민사회 부문은 대통령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국정에 반영시키고자 한다. 대통령에 대한, 정당에 대한 이들의 지지는 그래서 조건부적 지지라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한계는 개혁의 동력이 도태된 정당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하려고 한 점이다. 노 대통령과 손발이 맞을 리 없었다. 그는 당을 불신하게 됐다. 당도 그를 불신하게 됐다. 최근의 열린우리당 분규는 이런 상호불신의 연장일 뿐이다. ◈ 책임총리제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가 개혁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정당을 넘어 시민사회 부문으로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민적 다수가 지지하는 개혁과제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과감히 추지할 경우 그의 정치적 회생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가 집착하고 있는 책임총리제도 물론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총리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대통령중심제하에서 각료의 인선권을 비롯해 내각의 전반적인 운영을 총리에게 완전히 위임할 경우 총리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권력행사의 정통성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처한 최근의 곤경은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참담하다. 그가 과연 잃었던 신뢰와 지지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일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정치인과 바둑의 대마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그에게도 회생의 길은 열려 있다. 그의 어려움이 상당부분 스스로 자초한 성격이듯이 해결의 열쇠도 그가 쥐고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자신한테서 찾을 경우 해법은 의외로 쉽게 발견된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열린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는 메가톤급 카드를 터뜨려 정치적 위기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런 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약효가 먹힐지도 의심스럽다. 더 이상의 깜짝쇼도 통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다. 날로 악화되는 자신들의 민생문제에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대책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부족한 것들 중 하나는 실천력이다. 항상 말이 앞서고 행동은 뒤따르지 않았다. 12개 대통령 자문위원회에서 그동안 논의되고 정리된 국정과제는 더 이상 추가할 내용이 없을 정도로 방대하기만 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다 드러났고 파악되었다. 그런데 왜 그런 내용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 노무현 참여정부의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참여정부 참여정부의 한계는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다는 데 있다. 일례로 양극화를 들 수 있는데 이 문제는 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얼마 안 되어서 그 심각성을 거론하고 대책마련을 약속했던 사안이었다. 그로부터 2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사회 양극화 문제는 반복된다. 노 대통령이 거론할 때마다 당에서 추임새가 나오고 관련부처에서는 검토한다. 그리고 재원조달이 어렵다는 이유로 또 책상 서랍 속으로 쳐 박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각종 개혁정책들은 겉돈다. 청년실업, 세계최고의 자살률, 저출산 고령화, 제조업의 공동화, 성장잠재력 저하 등 모두 마찬가지로 토론과잉이다.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것은 공허한 구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책의 악순환 구조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기 위해서는 노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재원조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재정적 제약요인을 감안할 때 재원조달은 선택과 집중방식으로 해결되거나 발상의 전환을 이뤄 조세부담률을 인상해 재정수입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이후 크고 작은 민생관련 정책들이 시행됐음에도 국민들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책의 브랜드화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은 복지분배정책에 ’생산적 복지’라는 라벨을 붙였다. 노무현 정부하에서도 암환자 치료비 전액지원 등과 같은 획기적인 복지정책이 발표됐다. 또 각 부처별로 크고 작은 소외계층 대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 브랜드화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적 시선을 끄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 대국민 홍보를 강조하는 참여정부가 정작 홍보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셈이다. ◈ 정책의 총괄조정 기능도 취약해 청와대 비서실의 보좌시스템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이 이룩한 공적의 하나는 아마도 청와대 비서실의 논의구조를 시스템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논의구조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콘텐츠에 문제가 있으면 무의미하다. 유전게이트와 행담도 개발의혹 등에서 보듯이 허점이 드러났다.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의 관심사항에 대해서는 논의구조가 무력했다. 사전에 대통령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청와대 내부의 체크(점검)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대의 문제점은 정책의 총괄조정 기능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책의 정치적 판단 기능 또한 극히 미약하다. 정책의 브랜드화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한 관료는 “정부내에서 어떤 정책이 어디서 논의되고 있는지 잘 알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참여정부의 의사결정이 너무 복잡하다는 점도 장애물이다. 민주적인 토론과정은 합리적 결론도출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통령 자문위원회 심의 및 토론, 관련부처 장관회의, 총리실 주재 회의, 청와대 비서실 회의, 당정회의, 대통령 주재 회의 등 회의가 거듭되다보니 내용이 중복되는 등 부작용도 크다. 각 부서의 핵심부서 관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실제로 차분하게 일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소연 한다. 또 주요 정책의 경우 결국은 청와대 대통령 주재회의에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당부처에서는 “어차피 청와대에서 결정할 텐데…”라는 소극적 자세로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답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1년여에 불과한 노 대통령이 정치적 수렁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여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떤 대안을 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 “남은 것은 고집스런 대통령과 무기력한 여당의 모습뿐” 한편 이러한 가운데 집권 여당 내에서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쓴소리와 자아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지난 10일 여당 내 중도성향 모임인 ‘평화개혁연대’주최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열린당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원인과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시사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열린당은 국민에게 아무런 정치적 감흥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돼 버렸다”며 “열린당이 대통령과 민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일관성조차 상실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열린당은 보수에도, 진보에게도 불만족스러운 정당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또 "지금 여권에서 감동의 소재는 고갈되고 남은 것은 고집스러운 대통령과 무기력한 여당의 모습뿐"이라며 쓴소리를 내 뱉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김헌태 소장은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과 정치 중심적 접근에 대한 거부감, 여권의 무능 이미지에 대한 거부감이 '여론의 3대 포인트'라고 진단했다. 김 소장은 "열린당의 지지기반이던 중도성향 층은 한나라당으로, 진보성향층은 민노당으로 유입됐다"며 "특히 4.30 재보선 때만 해도 남아 있던 호남과 충청 지역의 기반이 사실상 붕괴됐다"고 주장했다. 한양대 정상호 교수는 "재선거 패배의 원인을 적대적 언론환경과 호전적 야당 등 당 외부에 두는 것은 잘못"이라며 "정부와 집권여당의 문제는 리더십-능력-성과 부족이라는 삼불(三不) 정치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열린당 기간당원 자격으로 참석한 전은제씨는 "열린당은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고 비난하며 "부도난 회사에 마지막으로 붙어 있는 것처럼 어디가서 당원이라고 명함 내밀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열린당은 전국적으로 지지받는 정당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망하는 당"이라고 폄하했다. 김현미 의원은 국정홍보처 차장이 '박정희 대통령은 고교 교장, 노무현 대통령은 대학 총장 격'이라고 한 것을 두고 "그런 얘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우리가 내놓은 정책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싸우는 모습이 주가 된 정부 홍보정책에 일대 쇄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반면 "이명박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 3개월 전부터 치밀한 홍보계획을 세워 움직였다"며 "청계천은 이명박 홍보의 승리"라고 예를 들었다. 김 의원은 또 "정책적으로 엄청난 것을 내놓겠다는 강박보다 국민들이 바라는 작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송영길 의원도 "우리당은 민심과 유리돼 정당개혁의 명분 아래 우리 내부의 논쟁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고 자아비판하면서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은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그 반대방향으로 민주당과의 합당에 연연하는 모습도 우리당 스스로의 자신감 상실과 자기존재 부정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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