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히트상품으로 불황 극복...산업 전반의 복고(復古)열풍 불어

어린 시절, 하늘만큼 커 보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옛이야기를 듣던 기억이 나는가? “아버지가 어렸을 적엔 말이지…”로 시작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들. 별로 흥미로움도 없고 ‘과연 그렇게 촌스럽고 어렵던 시절이 있었나?’ 라는 의심만 갖고서 그저 책 속에서나 있을법한 과거의 이야기려니 하고 그냥 끄덕이며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시간을 먹어가니 이제는 지난 시절이 흑백의 기억 속에 아련한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포장되어 ‘추억’이라는 형태로 다가온다. 아마 예전에 우리네 아버지들도 이런 추억을 그리며 당신들의 어린 시절인 그 때를 구술해 주셨을 거라 미루어 짐작된다. 이렇듯 한참 성장할 때는 과거를 돌이켜 볼 엄두도 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성장해서 성숙기에 도달하게 되면 지나간 과거가 그리워지고 그때의 추억이 가장 값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며 삶의 향기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과거지향적 마음을 꿰뚫고 흘러간 제품을 등장시킴으로써 향수와 추억을 함께 파는 게 바로 ‘복고마케팅’이다. 복고마케팅은 TV나 영화, 라디오 등 언론매체의 역할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수십년 전을 표현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등장한 제품들이 우연찮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유행되곤 하기 때문인데, 요즘 어린이 사진으로 가장 인기 좋은 품목 중의 하나가 바로 ‘교복사진’이다. 예전 중, 고등학생들이 입던 까만 교복과 모자를 꼬마아이에게 입히고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 그 시절에 같은 모습으로 학교를 다녔던 엄마, 아빠의 사진과 함께 아이들의 모습을 현상해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는 상품이다. ■ 옛 추억을 자극하는 ‘향수마케팅’ 산업 전 분야에 복고 마케팅 바람...추억의 히트상품 재현으로 불황 타개 2004년 연말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한 할인마트 사은품 코너 앞에서는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다. ‘4만원 이상 구매고객에 한해 지름 18Cm의 양은냄비 1개를 공짜로 준다’라는 할인마트의 전단을 본 주부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 결국 사은행사는 고객들의 큰 호응으로 짧은 시간에 사은품이 품절되고 추가로 주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할인마트측이 고객의 옛 추억을 자극한 ‘향수마케팅 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주부들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양은냄비에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기불황에 따른 소비 심리 위축도 있지만 무엇보다 향수를 자극한 할인점의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복고(復古)’열풍에 힘입은 이 ‘향수마케팅’은 주방업계는 물론 식품, 가전, 의류, 자동차 등 산업 전반에 걸쳐 퍼지고 있다.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업계의 마케팅 전략과 소비자들의 호응이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향수마케팅에 가장 적극적인 업종은 빙과, 제과 등 식품업계다. 실제로 최근 식품업계는 1960~90년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히트 브랜드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롯데삼강의 ‘삼강하드’는 국내 첫 아이스크림 브랜였다. 롯데삼강은 이 빙과를 36년만에 최근 다시 출시했다. 롯데삼강의 전신인 삼강산업이 1962년에 출시한 삼강하드는 그 이후 아이스바를 일명 ‘하드’로 통칭해 부를 정도로 국내 빙과업계에서는 상징적인 제품이다. 1969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롯데삼강이 영등포 공장시대를 마감하고 천안에 새 공장을 준공한 기념으로 최근 재출시한 것이다. 롯데삼강은 또 1978년 첫선을 보인 뒤 큰 인기를 얻었던 과즙음료 ‘삼강사와’도 다시 내놨다. ■ ABC포마드를 아시나요? 이 밖에도 농심은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카피로 유명한 ‘농심(農心)라면’을 최근 재출시했다.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로 지난 1~3월 고객을 대상으로 재출시 희망상품을 접수한 결과, 농심라면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 농심라면은 1975년 신춘호 회장이 새마을교육 연수에 참석했다가 간밤에 몰래 볏짚을 서로 날라다주는 ‘의좋은 형제’설화를 듣고 감명받아 신 회장이 직접 지은 브랜드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신 회장은 1978년 아예 회사 이름을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 바꿔버렸다. 한편 추억의 생활용품도 복고열풍에 힘입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태평양은 2005년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올 가을쯤 새로운 형태의 ABC포마드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ABC포마드는 1951년 옛 태평양화학공업사가 처음으로 출시한 야심작으로, 당시 태평양은 외산 광물성 포마드가 판을 치던 시절 업계 최초로 향료를 섞은 순식물성 포마드를 선보인 것이다. ‘2 대 8’ 가르마의 유행을 창조한 이 제품은 선수금을 맡기고 줄을 서서 받아갈 정도로 ‘대박’을 터뜨리기도 한 제품이다. ABC포마드는 1970년대 들어 그 생산이 중단되다가 1995년 재출시되기도 했다. 연간 매출은 20여억원이라고 한다. 1978년 ‘빨래엔 피죤’이라는 광고도 기억할 것이다. 이 광고 멘트 하나로 소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피죤은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업계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만들어 초기엔 판매가 지지부진했지만 백화점을 찾는 고학력 고소득층을 겨냥해 고급 브랜드 이미지 전략을 내세우면서 섬유 유연제의 상징처럼 그 독보적인 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럭키치약’도 되살리기에 들어갔다. 럭키치약은 LG생활건강이 1954년 회사 창립 당시, 모태 브랜드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10~20대를 겨냥해 맛과, 색, 포장디자인 면에서 톡톡 튀는 고감성 프리미엄 치약으로 ‘럭키스타’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음료업계도 빠질 수 없다. 롯데칠성은 1990년대 ‘따봉’이라는 단어가 국민적 유행어로 히트할 만큼 유명했던 ‘델몬트 따봉 주스’를 지난 4월 재출시했다. 이에 앞서 한채영씨를 모델로 1989년 출시된 ‘밀키스’광고를 다시 내보내고 있는데 이에 앞서 해태음료는 1976년 출시하고, 80년대 ‘흔들어 주세요’라는 광고카피로 유명한 장수 브랜드 ‘써니텐’을 2004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 흰색 와이셔츠가 다시 뜨고 있다 의류업계에서도 복고가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여성복뿐만 아니라 남성복에도 복고를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은 ‘흰색 와이셔츠’가 뜨고 있는 것.흰색 와이셔츠는 과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직장인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초를 거치면서 다양한 컬러 와이셔츠에 밀려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최근 흰색 와이셔츠는 ‘뉴 화이트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디자인도 과거 딱딱한 기본 스타일에서 화려한 도비와 자카드 문양의 스타일로 바뀌고 있다. 20대의 신사복 정장 재킷의 경우 3버튼에서 2버튼 스타일로 바뀌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젊은 남성의 패션’으로 자리잡았던 3버튼 정장이 한 발 물러섰다. 대신 버튼이 높이 달린 ‘하이 2버튼’ 시대가 오고 있다. 하이 2버튼은 과거의 2버튼 정장과는 달리 첫 단추가 배꼽 쯤에 달려ㅍ있지 않고, 3버튼의 첫 단추 위치만큼 높이 달려 있다. 이 때문에 다리가 길고 날씬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남성 정장 바지 역시 세미 스타일의 통좁은 바지의 시대는 가고, 일자형 통바지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과거 유행했던 일자 스타일보다 통이 더 큰 편이다. 이 밖에도 복고바람은 자동차, 가전 등에서도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서진수 강남대학교 교수(경제학)는 “과거의 추억을 자극하는 ‘향수마케팅’은 소비자들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킬 뿐 아니라 옛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시킨다는 취지에서 잇따르고 있다”면서 “당분간 ‘옛 명성’에 기댄 복고 브랜드 열풍은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복고풍 브랜드가 뜨는 이유는 마케팅 비용 절감 및 브랜드인지 효과가 높기 때문이라는 것. 업계 관계자는 “불황일수록 소비자들은 익숙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위험도가 높은 신규 브랜드보다는 기존 브랜드의 강점을 활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