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투쟁, 수도자의 길 아니다

지율스님이 마침내 단식을 끝냈다고 한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이제 일단 극한적 고비는 넘겼으므로, 필자도 이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최소한 이 글 때문에 스님이 다시 단식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단식은 끝났으되, 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더욱이 이번 사태는 스님의 주장과 요구가 옳고 그른지 여부를 떠나, 스님의 문제제기 방식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필자는 개발 못지 않게 환경을 중시하는 편이며, 새만금 문제도 공사중단을 지지한다. 자연환경은 모두가 똑같이 누릴 수 있지만, 개발에 따른 이익은 갈등의 불씨만 될 뿐 결코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천성산 문제도 내용을 잘 모르고 관심도 적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꼭 저렇게 터널공사를 강행해야 하나' 하며, 스님에 동조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 스님의 단식사태를 보면서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강제로 단식을 중단시키고 병원에 감금하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렸던 것이다. 불제자로서, 도를 구하는 수행자 수도자로서, 한낱 미물이라도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내 목숨처럼 여겨야 함은 당연하다. 또 모든 생명은 윤회하는 것이기에, 도룡뇽과 인간이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도룡뇽을 살리겠다고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는 건, 혁명투사의 모습일수는 있어도 결코 불제자나 수행자 수도자의 자세라고는 할 수 없다. 진리의 모든 것, 하늘의 뜻을 수행자가 온전히 미리 알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보되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식은 정말 곤란하다. 구도의 길에 어찌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투쟁이 있을 수 있으며, 천성산의 생명들이 터널공사로 깡그리 멸종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하늘의 뜻, 연기(緣起)가 아닐 수 있겠는가. 단식이 90일을 넘길 때까지 불교계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도, 스님의 투쟁방식이 너무나 비 수도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그동안 온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고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지율스님은 엄청난 죄와 업을 지은 것이다. 수억 미물과 한 사람을 바꿀 수 없는 게 천지의 도리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추구하는 불제자가 중생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지는 못할망정, 불편하고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스님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단식이라는 방식을 다시는 쓰지 말아야 한다. 스님이 단식을 풀며 남긴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의 미숙함으로 인해 많은 혼란과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그동안 함께 하여 주신 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일어서겠습니다" 제발이지 지율스님, 이 말씀을 명심해 주십시오. 앞으로 천성산 문제가 어떻게 흘러가든,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을 생각하시어, 단식과 자살은 결코 다시 생각하지 마십시오. 2005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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