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경찰의 폭행으로 혼수상태였다 이틀 후에 사망

▲ 30여년만에 장례식을 치르는 고 문영수씨./사진제공=고 문영수사건 대책위원회

지난 1982년 경찰의 폭행으로 숨진 뒤 경찰에 의해 행려병자로 둔갑돼 의대 해부용 시신으로 기증된 고인이 30여년만에 부모 곁에서 영면(永眠)에 들어간다.

고(故) 문영수사건 대책위원회는 오는 15일 전남대 의대 및 광주서부경찰서에서 '반인륜적 경찰폭력 시신훼손 희생자 고 문영수님의 장례식'을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위원회는 이날 오전 9시 전남대 의대에서 발인제에 이어 10시30분 광주서부경찰서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후 7시 강원 춘천 부모 옆에 문씨의 유골을 안장할 계획이다.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난 문씨는 1982년 8월 서울에서 버스운수노동자로 근무하던 중 부당해고를 당하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광주에 왔지만 사소한 폭행사건에 연루됐다.

이 사건으로 서부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던 중 경찰의 폭행으로 혼수상태로 병원에 후송됐다가 이틀만인 8월22일 숨졌다.

경찰은 서류를 조작해 문씨를 행려환자를 둔갑시켜 사건을 은폐했고 숨진지 하룻만에 시신을 전남의대 해부학교실 실습용으로 기증해 버렸다.

전남대 의대에서는 이듬해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 문씨를 실습시신으로 이용한 뒤 1984년 1월 화장해 추모관에 안치했다.

지난 1987년 5월부터 문씨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하고 다니던 유가족들은 치안본부의 '헤어진 가족찾기 캠페인'을 통해 사망사실을 확인했다.

문씨가 억울하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가족들은 사인규명을 요구하며 치안본부, 광주지검 등에 진정을 했고 당시 전남경찰국과 광주지검이 사건수사에 착수했다.

광주지검은 그해 8월 문씨 담당경찰관인 최모씨를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구속했다.

광주지방법원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최씨는 풀려났고 이 판결은 항소기간이 지나 확정됐다.

이후 유가족은 처절하면서도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1988년 10월17일부터 1989년 2월27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135일간 농성을 벌였다.

1998년 11월4일부터 1999년 12월30일까지는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률제정촉구'를 위해 국회 앞에서 422일간 천막농성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의 애타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000년 12월31일 열린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민주화운동 기각결정, 4년 뒤인 2004년 6월28일 2기 위원회에서도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내려졌다.

다만 불법 공권력 행사는 인정됐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유가족은 2009년 11월10일 진실화해위원회에 다시 진정서를 제출해 마침내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가의 사과와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적절한 구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를 이끌어냈다.

문씨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하고 다닌지 20여년이 지나서야 억울하게 숨진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는 단초가 마련된 순간이었다.

이후 2010년 9월10일 서울지방법원, 2011년 5월22일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유족이 최종 승소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폭력경찰과 안이안 공무원, 인습에 치우친 의사 등에 의해 이뤄진 천인공노할 이 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며 "가해자들의 사과조차 받지 못한채 이렇게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참담한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지난해 10월25일 가해기관인 경찰청과 전남대 의과대학, 광주 북구청 기관장들에게 면담요청 및 공문을 통해 "진심어린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개선책 마련, 장례 등 일체의 책임을 질 것"을 공식 요구하기도 했다.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너무 긴시간 고인을 방치해둔 잘못도 역시 적지 않기에 이제는 고인을 부모님이 잠들어 계시는 곁으로 모시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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