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적만 부각, 정치적 과오는 없다?

마포구 상암동에 지상 3층 규모의 기념관 개관
DJ정부 때 ‘정치적 화해’로 추진, 사업속도 더뎌
진보단체들, 기념관 폐관 촉구 등 갈등 재연 움직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 분야’평가, 시각차 뚜렷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이 개관했다. 시민단체들은 폐관을 주장했다. 전시내용은 지나치게 치적만을 부각시켰다. 정치적인 과오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지난 21일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사업을 추진한 지 13년 만이다. 박정희기념 사업회는 이날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 전 대통령 기념관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맹형규 행정안전부장관 등 여당 인사를 중심으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관 개관식을 가졌다.

기념관은 대리석 건물로 지상 3층에 부지 9275㎡, 연면적 5290㎡(1,603평) 규모다. 2층의 제1 전시실은 박 전 대통령의 대형 사진과 18년6개월 그가 했던 일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꾸며놨다. 1층의 제2 전시실은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농업 개발 ▶중화학공업 정책 등을 설명하는 모형과 유품으로 채워져 있고, 2층 일부와 3층에 올여름 도서관이 들어선다.

표류했던 기념관 사업

기념관 전시실은 입구부터 웅장하다. 입구정면에는 박정희대통령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2층 제 1전시실에는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박대통령의 치적이 주로 전시됐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내용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동영상, 새마을운동 관련 동영상 등이 복도에서 재생되고 있다. 특히 제 2전시실 중앙에 위치한 ‘박대통령 시대의 종합발전상’ 전시장에는 각종 화려한 동영상과 조명이 총동원됐다.
공업단지와 수출자유지역, 댐과 수력발전소 등 벽에 붙은 분야별 버튼을 누를 때마다 관람객 발밑에 위치한 미니어쳐에 조명이 비춰지고, 관람객들을 위쪽에서 둘러싼 사방의 스크린에서 관련 동영상이 재생됐다.
버튼 옆에는 ‘박정희대통령의 조국근대화는 성공하였고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의 기적을 만들어내며 폐허의 땅에서 세계 속 경제강국으로 급부상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제 3전시실에는 부인 육영수여사의 친필 문서와 의복, 취미생활에 쓰였던 사진기 등 개인생활과 관련된 물품이 전시됐다.
하지만 전시실 어디에도 박대통령의 재임기간 정치적 과오로 평가된 부분과 일제 강점기에 친일 논란에 대한 내용 그리고 5.16 군사쿠테타의 기록은 전혀 없었다.
개관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기념관은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화해의 제안으로 건립이 처음 추진됐다. 기념 사업회는 김대중 정부에게 지원받은 208억 원에 민간기부금 500억 원을 추가해 2004년 완공을 목표로 했으나, 시민단체 반대운동 등 여론이 좋지 않아 모금액이 100억 원에 그쳐 사업이 중단됐다.
참여정부에서는 5년 동안 사업진행속도가 더디고, 건축비로 같이 쓰기로 한 기금모금이 부진하다는 이유를 들어 국고보조금 지급을 취소했다. 표류하던 박정희기념관 건립 계획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시작됐다.
2005년부터 4년에 걸친 소송 끝에 박정희대통령기념 사업회는 ‘국고보조금 취소는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냈다. 2010년 3월 재개된 공사는 현 정부의 174억원 지원금 집행으로 탄력을 받아 건립에 박차를 가해 작년 11월에 완공을 마무리 했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도서관 건립에는 국고보조금 200여억 원, 국민모금 30억 원 등 총 230여억 원이 투입됐다.

“과거 독재역사 정당화”

개관식이 있던 날, 입구 정면에서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비롯한 10여 진보단체들의 ‘박정희 기념관’ 폐관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함께 집회가 열렸다. 80여 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진보시민단체들은 추진 13년 만에 문을 연 박정희기념관이 “과거 독재역사를 정당화하고 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즉각 폐관을 주장했다. 또 “박정희기념관 개관이 이번 4.11 총선을 의식해 서둘러 개관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는 “그 동안 박정희 우상화의 본산이 될 기념관 건립을 저지해왔지만, 수구세력의 집요한 압박으로 결코 만들어져서는 안 될 기념관이 들어섰다”고 밝혔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친일파에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반민주적인 인물이라며 후세들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며 말하며 “박정희기념도서관은 역사를 배신하고 정의를 버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박근혜 위원장이 박정희기념관 개관을 총선용으로 서두르고 있다”며 “서울시는 박정희독재기념관을 즉각 폐관하라”고 거듭 주장했다.
또한 집회 참가자들은 성명서에서 “자숙해야 할 유신 잔당들이 유신의 망령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며 “박정희 기념관을 허용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기념관이 들어서는 비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박정희기념관에 대해 기념사업회와 시민단체, 야당과의 인식차이가 왜 큰 것일까?. 바로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때문이다. 경제부문에 대한 평가는 이해의 일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문과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르다.
개관식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곳은 대한민국의 국가발전 동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국가와 국민이 어떤 공감대 속에서 성취를 이뤄냈는지,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배우는 소중한 배움이 장이 될 것”이라고 언급해 경제부문을 강조했다.

경제성장 이룩했지만

또 그녀는 “저는 요즘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잘 사는지에 대해 아버지가 말씀하신 내용이 상세히 떠오르곤 한다”면서 “아버지는 배부르게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도 잘 사는 것이지만 그것만 갖고는 정말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이웃이 굶고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품위 있는 생활하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며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되는데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라고 경제발전 부문의 공과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실제 기념관 전시실에도 경제발전부문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정치부문과 인간 박정희에 대한 진보시민단체의 평가는 단호하다. “내 자식에게 어떻게 도서관을 가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그 처절하고 살벌했던 군사독재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구경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의 표현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안경호 4·9 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은 “사법살인과 인권유린 등 수많은 과오를 저지른 인물에 대해 시민 전체의 뜻을 수렴하지 않은 채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특히 국가예산이 대거 투입된 건물이 박 전 대통령 개인을 기념하는 데 쓰이는 것은 부당하며 기념관을 공동도서관 등으로 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화합 차원에서 건립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그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일제 시대에 혈서쓰고 만주국 장교가 돼서 항일세력과 싸우고, 독재를 했던 사람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우리자식들에게 기념화할 수 없는 내용을 기념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범죄의 재구성 현장'이라는 것이죠” 라며 격앙된 어조를 보였다. 기념관 건립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국민화합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것은 박정희 전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독재와 인권유린은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 개인이 용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직 대통령의 기념관과 도서관은 대통령과 지지자인 국민을 그가 퇴임한 이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주는 정신적인 공간 역할을 한다. 미국에는 전직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12곳 있다. 개인이 후원금을 통해 스스로 짓고, 운영과 관리는 ‘정부기록 보관청’이 맡는다. 업적을 꾸미고 규모를 크게 하려는 경쟁 때문에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해마다 20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돼있다.
우리의 경우 전직 대통령들은 과거의 역사적 질곡과 정치적 문제 때문에 좌표를 잃고, 망명하거나 암살되고 감옥에 가거나 은둔했기 때문에 임기 후 기념관같은 공간마련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대통령제가 역사성을 갖고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많은 전직 대통령들은 임기 중 그들의 과오를 떠나 퇴임 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새로운 인간 대통령이란 부분이 부각되어, 도서관이나 기념관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 후 대학교와 연계된 ‘대통령 도서관(presidential library)’ 및 ‘대통령 기념관(presidential museum),’ 나아가 ‘대통령 스쿨(presidential school)’을 설립한다. 이를 통해 해당 대통령의 이념과 정책을 계승 발전시킬 미래의 지도자 육성에 노력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도서관 및 기념관이 소장한 방대한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국정운영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심도있게 연구하여 역대 정부 정책의 성공과 실패요인을 도출함으로써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제고시키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 기념관 및 도서관의 다양한 역사적 기록물을 활용한 전시 및 강연 활동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이해와 존경 그리고 시민의식의 성숙에 도움을 주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비추어 볼 때 우리도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을 따르는 이들이 기념관을 짓고, 각종 전시를 통해 그의 업적과 유지를 알리려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경계하고 치적은 승계하는 뜻 깊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취지로 김대중도서관은 이미 문을 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추진 중이다. 독재자라고 해서 박정희기념관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

“치적과 과오 함께 전시해야”

문제는 그곳에 전시될 기념물의 내용이다.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의 일방적 주장과 일방적인 미화와 찬양을 위한 왜곡은 없어야 한다. 대통령은 개인으로 평가할 인물은 아니다. 한 시대 역사의 주인공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적 판단이 수반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왜곡의 전당이 되어선 안된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문제로 후세가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직함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기념관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잘못된 점은 철저히 덮어둔 채 치적만을 발췌하고, 과장해 모든 과오를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주장대로 1960~70년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이 전시만 본다면, 박정희는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선구자로만 각인되기 십상이다. 올여름 개관한다는 도서관 역시 개인의 소장품이나 국무회의 안건, 친필 지시 등을 수집해서 정리한다고 하니, 도서관이 박정희 찬양의 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왜곡된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국민의 혈세와 시민의 재산이 이용됐다면 누가 수긍하겠는가?
4·9평화통일재단의 안경호 조사실장은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부지는 서울시 소유이고, 운영권만 '박정희기념 사업회'에 있다. 기부체납 후 3개월 정도에 기간이 걸려야 함에도 갑자기 개관 발표를 했다”며 “기부체납 절차 단계를 넘어 개관하게 되면 후에 서울시가 이름이나, 운영문제를 바꾸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도서관이나 기념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 건물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고려할 때 지금이 아닌 다음 세대를 고려하는 신중한 판단과 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호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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