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공무원 1호 김현희

▲ 탈북관련 사진전시회

우리 사회에 2만3천여명의 탈북자가 있다. 가족과 친지, 부모와 남편 그리고 자식을 떨쳐 놓고 탈북한 그들의 삶은 어떨까? 탈북자가 북한에서 직접 겪은 북한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어 본다.


“재미있죠.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만나야할 사람도 많고,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요즘 생활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탈북공무원 1호인 김현희(가명,43)씨의 첫마디였다. 그녀의 말에 약간의 북한 억양이 묻어나긴 했지만, 거의 우리 표준 억양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의욕이 넘쳐 보였고,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사무실에서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남한에서의 생활이 4년 반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남한생활에 적응을 잘 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탈북자 중 정착을 잘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매일 탈북자들의 고충을 듣다보면, 안타까운 일이 너무 많아요. 의욕은 많은데, 짧은 시간에 다른 사회체제에 적응하려고 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것이 그들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 같아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녀는 자신의 업무에서 오는 어려운 점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작년 입국자 여성 70% 차지

통일부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2만3천100명으로 집계됐다. 2011년 북한이탈주민 입국 인원은 총 2,737명으로 2010년 2,379명 대비 15%가 증가했지만 2009년 2,927명 대비 6%가 감소했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국내 입국 북한이탈주민의 연령은 30대(32%)와 20대(27%)가 다수를 차지했고, 학력은 고등중(중고등학교)졸업이 70%로 절대적으로 많았다. 작년 입국자 가운데 여성이 70%를 차지했다.
이 같은 추세로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국내에서 결혼을 할 경우 탈북자와 관련된 가족의 수는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 정부의 탈북자와 관련된 정책들도 지금의 ‘관리차원’의 정책에서 ‘적응할 수 있는’ 정책으로의 대폭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1990년부터 탈북자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본격적인 통계가 시작된 1998년부터 자료를 보면, 지금까지는 단순 탈북자의 숫자만을 강조했지 국내에서 형성된 가족에 대한 부문은 빠진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에 대한 용어도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법률상 용어로는 ‘북한이탈주민’이라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주소ㆍ직계가족ㆍ배우자ㆍ직장 등을 두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벗어난 후 대한민국 이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새터민’등 다양한 용어로 지칭

그 동안 탈북자에 대한 용어는 다음과 같이 몇 차례 바뀌었다. 실제 1993년 이전에는 귀순자(歸順者)나 귀순용사(歸順勇士), 1994년~2004년에는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2005년~2008년에는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2008년부터 현재까지 북한이탈주민으로 지칭된다.
따라서 현재 법률상 공식 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이 ‘탈북자’의 대체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단체나 기관에 따라 ‘탈북자’, ‘새터민’ 등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에 대해 정부에서는 일정기간 교육 및 정착지원제도의 정비 등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탈북자는 탈북동기, 신원, 위장입국 여부 등을 수사당국으로부터 조사받은 후 탈북자 지원조사기관인 하나원에 보내져 12주 동안 사회적응교육을 받고 이후에 취직, 주민등록, 임대주택알선 및 정착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정부에서는 탈북자들의 정착지원 사무소로 하나원(1999년 7월 개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보호대상자에 대한 보호 및 정착지원을 하고 있다.
탈북자들의 남한생활의 적응에 대해 그녀는 “많이 힘들어 합니다. 사회주의의 배급제도 에 익숙한 사람들이 경쟁을 통해 스스로 먹거리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적응이 어렵다”며 “그런 사람들을 상담하고 남한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 임무이자 업무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탈북자들 중 남한사회에 제대로 적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최근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배급이 제대로 안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남한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설득을 한다고 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정말 힘들어해요. 젊은 층들은 남한사회에 빨리 적응하고 있는데, 노인 분들은 워낙 북한체제에 익숙해 있어 경쟁에서 항상 밀려요”라며 그들에 대한 또 다른 배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녀는 평양에서 살았다. “평양은 특별시인데, 평양에 사는 사람은 특별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모든 분야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북한정부에서도 특별한 관리와 함께 그 만큼 대우를 해줍니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두운 기색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평양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서는 특권층이다. ‘당성’과 ‘출신성분’이 좋아야 하고, 교육정도와 직업도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 만약 평양 이외의 주민들이 평양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와 검문 그리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만큼 평양은 북한사회에서 또 다른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에서 교사의 지위는

그녀는 북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교사는 우리의 초등학교 교사와 비교할 때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사상교육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교사에 대한 예우는 각별하다. 최근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한 질문에 “말도 안되는 일이죠. 어떻게 학생이 교사한테 덤비고, 교사를 무시합니까? 제 아무리 잘난 학부모도 교사 앞에서는 꼼짝 못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전직 교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김정일이 어릴 적에 말을 듣지 않아 담임교사와 김일성 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북한에서 교사가 어떤 직업인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평양시민들이 접한 남한의 대중문화에 대해 물었다. “80년대 말 많은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그것이 남한노래인 것을 몰랐어요. 특히 90년대에 들어서는 비디오테잎과 CD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물론 보안당국에 걸리면 큰일 나죠”라는 그녀는 “2000년대 들어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남한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아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평양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사회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북한당국도 이런 것들이 고민거리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파트단지마다 전파차단기를 설치하고, 테잎과 CD의 유통을 막기 위해 검문을 강화했지만 단속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고 말한다. 특히 북한당국은 그들의 표현대로 ‘문화적 침투’, ‘자본주의적 황색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찾고 있지만, 평양과 평양시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많은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양에서의 혁명가능성은?

그렇다면 남한의 대중문화가 평양시민들 사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평양에서의 혁명가능성을 조심스레 물었다. “남한의 대중문화는 단지 소비할 뿐이지 그것 때문에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평양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 정권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엘리트 또는 특권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놓을 수는 없죠”라며 그 가능성을 어렵게 예상했다. 많은 북한 전문가들도 혁명이나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그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과 같은 국경지역에서나 가능하지 그 외의 지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평소 기자가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일반 인민들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보면 우는 모습이 자주 비치는데 연출된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런가?”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연출된 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신(神)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멀리서라도 그를 본다는 것 그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조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기자의 의구심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실제로 북한에서의 김일성 부자에 대한 신격화는 일찍부터 이뤄졌고, 김정일까지 이어졌다. “김정은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김정은에 대해 얼마나 세뇌교육을 했겠습니까?”라고 그녀는 오히려 질문을 했다. 김정은에 대한 모습은 연출된 것이라고 암시를 했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평양인민들이 김일성 부자에 대해 갖는 의미와 세뇌교육의 정도를 예상할 수 있었다.

통일에 대한 전망은?

마지막으로 통일에 대한 질문을 했다. “통일에 대해 북한 인민들이 생각하는 것과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달라요. 시기도 그렇고, 방법도 너무 달라 어느 것이 좋은 방법인지 혼란스럽습니다”면서 “북한에서는 남한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는데, 남한에서는 별로 그렇지가 않아요. 지난 김정일 사망 때도 남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제가 오히려 당황했죠. 아직도 상대방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하면서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은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녀는 새터민들의 생활과 관련해 “많이 고생하고 있죠. 새터민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는데, 서로를 만나면 신세타령을 많이 하죠.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그리고 노래방도 갑니다. 남한노래인지 모르고 북한에 있을 때 불렀던 노래를 많이 해요. 저는 특히 심수봉 노래를…”말끝을 흐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이산(離散)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011년 3월 22일 부산에 정착했던 새터민 8명이 해외로 망명을 신청했다. 일부는 북한에 간첩으로 포섭되어 반북단체 관계자에 대한 테러를 시도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2만명 이상의 탈북자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만, 실제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대해야 할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같은 민족이고 통일은 반드시 돼야 된다고 말들은 많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교육이나 지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새터민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들이 우리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고, 통일을 준비하는 첫걸음인 것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행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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