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벨트·신공항 입지 선정 놓고 청와대·여권 깊은 시름

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와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문제를 놓고, 여권이 깊은 시름에 빠졌다. 과학벨트와 동남권 신공항 유치를 둘러싸고 충청권과 호남·영남권 등 각 지역간에 격하게 대립하면서,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권에서는 과학벨트와 신공항 입지 선정 문제로 인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크게 패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1일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방송좌담회 ‘대통령과의 대화, 2011 대한민국은’에 출연, 과학비즈니스 벨트 입지 선정 원칙에 대해 “대답할 시기도 아니고 입장도 아니지만 세종시는 정치적으로 이뤄진 것이고 과학 벨트는 완전히 과학적인 문제”라고 밝혔다.

과학벨트, 공약 뒤집기?

이어 이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시킨 과학비즈니스 특별법은 올해 4월5일 이후 유효하다. 이후 추진위원회가 발족돼 부지를 선정한다. 어느 누구도 (과학비지니스 벨트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를 할 입장이 되지 않는다. 국무총리가 위원회를 발족하면 위원회에서 충분히 토론해 결정될 것이다. 그 이전에 이야기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이에 사회자가 “백지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냐”는 질문에, 이 대통령은“위원회가 발족하니 그것과 똑같다”고 답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발언은 과학비즈니스 벨트를 백지상태에서 검토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즉 지난 2007년 대선 공약 사항인 ‘충청과학벨트 유치’를 공식 파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에 충청권이 즉각 반발하자, 청와대는 수습하기 급급했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방송 후 파문이 커지자 “(이 대통령의 발언은) 과학비즈니스 벨트 공약을 백지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하겠다라는 의미”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파문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우선 야권의 반발이 거셌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둔 자유선진당은 지난 6일   청와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이회창 대표가 직접 나서 “이 대통령은 충청권에 과학벨트를 짓는 원대하고 찬란한 계획을 헛되이 포기하거나 짓밟아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도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충청권 도민들을 얕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세종시로 그만큼 상처를 줬으면 됐지 이번에 또 한 번 가슴에 상처를 주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여권 내부 분열

야권 뿐아니라 여권 내부에서도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충청 몫 지명직 최고위원인 박성효 최고위원은 “‘대통령의 공약이 이렇게 변질될 수 있나’하는 것에 충청도민은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며 “믿을 수 있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처럼 한나라당내 충청권 인사들이 이 대통령의 발언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은 “이 대통령이 영남권에 과학벨트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대구·경북·울산 등 3개 광역 지차체들이 공공 유치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유치전에 뛰어든 상태다. 이들 지자체들은 이 대통령의 고향이고, 여기에 이미 방사광가속기를 유치했다 점 등을 들어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여기에 구미의 IT, 포항 철강, 울산 자동차, 대구 기계 등 과학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연결하는 주력 산업벨트가 형성돼 있는 만큼, 과학벨트 조성의 최적지가 ‘영남권’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도 “과학벨트 전체를 어느 한 지역에 몰아줄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적 해석도 나오고 있다. 과학벨트의 분산 유치 등을 통해 ‘영남권 민심을 잡기 위한 차원’이라는 얘기가 정치권에 흘러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남과 충청에 과학벨트를 쪼개서 유치하는 방안’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대선공약을 통해 충청권에 유치하기로 한 과학벨트를 영남권에 줄 경우 충청권의 반발로, 차기 대선과 총선에서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며 “반대로 충청권에 과학벨트가 모두 유치된다면 영남권도 민심이반이 심각해 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런 점들이 한나라당의 고민거리다. 또 정치적 이해 때문에 과학벨트를 분산할 경우, 국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산-TK 대립

과학벨트와 함께 신공항 유치 문제도 여권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의 동남권 신국제공항 입지 선정은 오는 3월말에 있을 예정으로, 현재 가덕도를 주장하는 부산 지역과 밀양을 선호하는 대구와 경북, 경남, 울산 등 나머지 영남권 4개 지역간 경쟁구도다.


그리고 각 지역간 경쟁구도로 인해 지역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신공항 유치’문제는 여권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유승민, 배영식, 주성영, 홍사덕, 이명규, 서상기, 이한구, 박종근, 조원진 등 한나라당 대구시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지난 8일 오전 여의도에서 신공항 입지 선정과 관련해 긴급 모임을 갖고 청와대와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지난 10일 임태희 대통령실장을 만나 “동남권 신공항은 밀양에 들어서는 것이 경제성·안전성 등의 차원에 낫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임 실장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결론 내리겠다”고 답했다.
 

이에 맞서 한나라당 부산 출신 의원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부산시당 위원장인 김정훈 의원은 “국토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가덕도가 5천억원 이상 비용이 절감되어 경제적이고, 가덕도 공항을 해안에 좀 더 가까운 쪽으로 이동하여 건설하면 3조원 이상 비용이 절감된다”며 “항공기 충돌사고가 해발 200m에서 주로 발생했는데 밀양공항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해발 500~700m의 주변 산들을 절반 이상 절토하여야 하므로 이는 환경 대재앙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또 “동남권 신공항은 국가적인 대역사 이므로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며 “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공정하게 심사하여야 그 결과를 누구나 수긍할 것이므로 심사 평가 절차를 공정하게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었다. 
 

특히 대구·경북·경남 출신 의원들과 부산 출신 의원들간 대립 과정에서 “탈당불사”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신공항 유치전이 과열 조짐을 보이자 급기야 당 지도부가 나서 자제를 부탁하고 있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갈등상황이 심각한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정부가 합리적으로 결정하면 될 일이지, 지역에서 수만명을 모아 놓고 집회를 열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고민스런 여당

이처럼 당 지도부까지 나서 ‘신공항 입지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과학벨트 유치 문제와 비슷한 맥락으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부산이 강력 유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신공항을 TK(대구·경북)의 요구대로 밀양에 유치될 경우, 부산 민심이 강력히 반발할 것이란 관측이다. 반대로 가덕도에 신공항이 유치되면, 한나라당의 텃밭인 TK지역의 민심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이 영남권에서 크게 고전한 바 있다”며 “여권 입장에서는 ‘신공항 입지 문제’는 그만큼 난제다. ‘TK를 밀자니 부산이 그렇고, 부산을 밀자니 TK가 문제고’, 여권으로서는 곤혹스런 대목이다”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또 “‘신공항’ 및 ‘과학벨트’ 유치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할 가능성 높다”며 “하지만 여권이 충청권과 영남권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뚜렷한 묘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흉흉한 민심을 돌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 여권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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