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뜨거운 감자 ‘개헌론’ 두 얼굴

48년 7월17일 헌법 공포 후 9차례에 걸친 개헌
‘10차 개헌호’ 이미 항로 출발 위해 뱃고동 소리
파고 헤치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지 미지수

정치권의 하반기 최대 화두로 ‘개헌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개헌의 적기는 올해”라고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한나라당 당론이 정해져 제안해 오면 논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특히 박희태 국회의장은 “개헌 논의를 국회로 가져오면 논의의 장을 만들겠다”며, ‘개헌 논의 뒷받침’을 언급했다.
‘개헌론’이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며 공론화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7월17일 공포된 우리 헌법은 그동안 9차의 개정 과정을 거쳤고, 이번에 다시 개정이 된다면 10번째이다.
따라서 제헌 이후 헌법 개정의 역사를 돌아보고 과연 이번에 다시 헌법 개정이 가능할지 진단해 본다.

우선 ‘대통령 5년 단임제’가 핵심인 현행 헌법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각계에선 대체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임에 따라 반복되는 ‘레임덕 현상’이 그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란 대통령으로서 향후 정치적 보상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독단적 정치 행태를 보이게 되며, 5년이라는 임기안에 성과를 만들기 위해 과도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집권 영장 개헌

‘레임덕 현상’이란 대통령 선출 직후부터 차기 출마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권력 누수 현상이 발생하기 쉽고, 임기말로 갈수록 심해져 사실상 국정운영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대통령 임기는 5년인데,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임기는 4년으로 임기가 서로 맞지 않아 거의 매년 선거가 있는 것도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필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5년 단임제를 채택했을까.
여기에 대해선 대체로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이 헌법을 만들 때 과거 권력자들의 독재 폐해를 워낙 철저히 봐왔기 때문에 5년 단임제로 하면서 정권교체과정부터 제대로 정착시키자는 취지였다.
다른 하나는 당시 야권의 지도자였던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의 정략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가의 한 인사는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양 김씨 두 사람의 나이가 이미 60을 넘어 사실상 한번씩 대권을 잡도록 묵시적으로 합의한 것이 5년 단임제”라고 보고 있다.
그럼 지난 제헌 이후 9차례 걸친 헌법 개정의 역사는 어땠을까.
첫 헌법 개정은 1948년 국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간선제로는 집권이 불가능하게 되자 직선제로 바꾼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승만은 직선으로 다시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두 번째 개정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이 핵심 사인이다. 일명 ‘사사오입’으로 불려진 이 개헌으로 이승만은 영구 집권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을 저질러 4.19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과도 정부가 들어서면서 3차 개헌을 하게 되고, 이번에는 다시 직선에서 간선으로 바꾸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했다. 그 결과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이 탄생되었다.
장면 내각은 집권 후 다시 개헌을 하게 되는데, 3.15 부정 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토록 하는 제4차 개헌을 완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5.16 군사혁명으로 역사 속으로 소멸된다.
정권을 잡은 군부세력들은 최초의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중임제를 채택하는 5번째 개헌을 성사시켰다.
내용은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임제로 바꾸었고, 이어 직선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선출된다. 1962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도 결국은 장기집권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3선을 위한 개헌을 시도한다. 이것이 1969년 통과된 6차 개헌이다.
특히 박 정권은 6차 개헌후 1971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간신히 승리한 뒤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간선제를 통한 영구집권을 모색하게 되는데, 1972년 ‘10월 유신’ 즉 7차 개헌이었다.
‘유신 헌법’의 핵심 내용은 대통령 중임제 제한을 완전 철폐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항구적으로 집권할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다.
그러나 박 정권은 1979년 10.26 사태로 몰락한다.
다시 개헌론이 부상할 무렵 이번에는 신군부로 불리는 전두환 군부세력이 12.12 사태를 통해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다.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세력은 1980년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간선으로 임기 7년 대통령을 선출하는 내용의 8차 개헌을 통과시킨다.
전두환 정권이 공식적으로 역사에 전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전 국민의 항거 즉 1987년 6월 항쟁을 맞아 결국당시 집권당 노태우 대표가 6.29 항복 선언으로 직선제를 수용한다.
이에 따라 1987년 야권의 김대중 김영삼, 여권의 노태우 대표 등이 합의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현행 헌법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이번엔 직선·간선
병행 ‘분권형’?

이러한 가운데 이같은 현행 헌법을 다시 한번 개정하자는 ‘개헌론’이 올 초부터 정가 구석에서 솔솔히 나오더니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전면에 부상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개헌론’은 이번에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새로 당선된 신임 안상수 대표와 기존의 김무성 원내대표가 더욱 부채질하고 나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안 대표는 연일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너무 크다”면서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다”고 불을 지피고 있고, 김 원내 대표도 “5년 단임제 동안 역대 대통령이 자기 당을 떠났는데, 이것은 이미 실패한 제도”라면서 “올 9월 국회에서 개헌 특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야당의 반응도 차갑지만은 않은 상태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개헌을 하자고 제안하려면 한나라당 내부의 당론부터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야당과 대화와 타협, 토론할 생각을 해야 한다”고 응수를 하고 나섰다.
정 대표의 이같은 발언은 한나라당이 당론을 정해 공식적으로 개헌을 제안하면 야당으로서 논의를 해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박희태 국회의장도 제헌절 기념사를 통해 “여야가 개헌 논의를 국회로 가져올 경우 열심히 뒷받침 하겠다”며, ‘개헌 논의’에 힘을 보탠 상태이다.
이미 ‘개헌호’가 항구에서 항해를 위해 출발하기에 앞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처럼 정치권 전면으로 파고들 태세이다.
하지만 비록 ‘개헌호’가 출발은 하더라고 험난한 파고를 헤치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지는 미지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선 “87년 이후 현행 헌법으로 집권한 역대 정권마다 임기 중반을 넘기면 차기 정권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다가와 교묘히 그 틈새를 ‘개헌론’이 넘봤지만 다 흐지부지 됐다”며 “이번 개헌론도 여야의 합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이 없으면 결코 성사될 수 없는 어려운 과정”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특히 “국민적 동의가 미지수인 ‘분권형 개헌’은 더욱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뒷따를 것”이라면서 “더구나 차기 대선의 유력한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경우 ‘개헌론’은 지난번 세종시의 운명처럼 그 뒤를 밟을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국민적 합의와 명분 없이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쉽지 않다”며 “지난 탄핵 정국 시절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손잡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시켰지만 한나라당과 손잡았던 당시 민주당 세력들이 총선에서 몰락한 예가 이를 잘 말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로 얻어진 현행 헌법이 과연 올 가을 전면적인 개보수를 거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지 아니면 현행 헌법의 가치가 그대로 인정되어 차기 정권까지 몇 년간 생명이 더 연장될지 주시되는 국면이다. st12@sisa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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