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인숙의 마음의 풍경(4)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산길을 걷고 있었다. 가을도 아닌데 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들이 온통 말라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나무가 아른아른하여 마치 산 전체가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 궁금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뭇잎을 만져보다가 뜯어보았다. 이내 이파리를 뜯어낸 자리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뿐만 아니라 맑으면서도 음울한 마치 고대 미사곡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음산한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나를 향해 엄습해왔다. 나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또 달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한여름 밤의 꿈치고는 너무 오싹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감기로 괴로워하는 아이를 다독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한낮에 달구어진 집은 밤중이 되어도 쉬이 식지 않았다. 잠시 땀으로 범벅된 아이를 닦아주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고 있는 아이들이 마치 접지 않은 빨래처럼 꼬깃꼬깃해 보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때늦은 귀갓길의 택시 한 대가 유리창을 향해 쏘는 불빛이 마치 왈츠를 추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아름다운 빛과 현상으로 전해 주는 하늘의 메시지만 알아들을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경종이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다가도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수선할 때, 반드시 했어야 할 일을 잊거나 실기했을 때, 수고로써 묵묵히 최선을 다하기보다 결과에 더 마음이 가 있을 때 나는 자폭하곤 했다. 그렇게 생각의 언저리를 서성거리며 마음을 할퀴다 의미 없이 하루를 보낸 날은 여지없이 음산하고 퇴폐적인 꿈을 꾸곤 한다. 하얀 피를 흘리는 검은 나무숲을 정신없이 헤맨다든지, 검게 그을린 팔과 다리가 즐비한 자판이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는다든지 아님 검은 십자가가 박혀 있는 산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든지. 그랬다. 생생하게도 검고 하야면서도 칙칙했고 음울했다.
누구에게든 자신만의 영혼 다스리기 비법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한층 정신이 맑아진다. 마치 조각조각 해체해 깨끗한 물에 헹구어낸 후 다시 짜 맞춰진 정신으로 새로운 지령을 받은 것만 같이 의욕이 솟구친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담당하고 치유할 수 있는 민감하고도 놀라운 존재다. 때문에 절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운으로, 뒤틀림을 기회로, 시련을 자양분으로 삼으며 모든 부정을 긍정으로 밀고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 원초적 에너지를 느끼고 인정하는 일만으로도 삶을 끝없이 변화·전진시키며 스스로를 위대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애초부터 그렇게 위너(Wiener)였듯이.
하지만 사람은 기계처럼 설정된 콘텐츠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더군다나 세상에 공짜란 없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쩜 은연중에 영혼 한 조각의 상실과 맞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완벽한 조건 하에 생을 달리지는 못한다. 어딘가 생을 능멸하는 복병이 있고 무언가 반드시 수행·극복해야 할 천명이 있다.
때문에 위너가 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생각하고 배우면서 적당한 보폭과 부지런함으로 실천이 따르는 의식을 확장시켜 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일무이한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뮤지컬을 공부하는 아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나는 귓전에 대고 속삭이곤 한다.
'살다보면 특히 꿈을 가진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때가 더 많아. 삶과 꿈도 쟁취하는 거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항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그렇게 꿈과 정면으로 맞서는 거야. 가장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진정한 승자는 어떤 상황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고통과 좌절마저도 철저하게 즐기며 자신의 행복을 지켜내는 사람이야. 사람의 진가는 바로 그런 때 나타나는 법이지. 넌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 알고 있잖아.’
Carpe diem(카르페 디엠)! 현재 이 순간에 충실 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지혜롭고 스스로 자유 한 자는 결코 현재를 놓치지 않는다. 기회란 오직 현재에만 있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시련과 게으름도 당당하게 즐겨라. 그 안에서도 꿈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바로 지금 열정과 사랑이 없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삶이 굴절되는 것이다.
Do it now(지금 하라)!
꿈이 있다면, 살아 있다면 기다리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어떠하든지 바로 지금 하라. 완벽하게 갖춰진 때란 결코 없다. 바로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깨지고 터지고 추락하더라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영혼의 울림에 늘 귀를 기울이며 꿈을 꾸어라. 자신을 인도하는 가장 정확한 지도는 바로 자신의 내면에 있고 자신이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가장 명쾌한 키는 항상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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