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디나 다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봄.

언제고 비가 내리는 것을 나는 무척 좋아 한다. 소슬 거리며 내리는 빗소리......... 고요한 강 같은 평화와 어린 시절 추억 속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는 빗소리.... 산골에서의 어린 날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했었다.
하늘밑 온천지가 놀이터였다. 그렇게 들로 산으로 날개 단 듯 뛰어다니며 어린 날들을 지냈다. 봄이 오면 들로 나가 갖가지 봄나물 들을 캐러 다녔다. 쑥, 꽃다지, 씀바귀, 달래, 냉이 등등 산마다 미각을 돋울 어린 싹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진달래, 삐삐, 통통하게 물오른 찔레, 소나무 송구, 골짜기로 흐르는 물가의 버들강아지들은 언니를 따라나선 티격태격, 코찔찔이들의 맛있는 간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연보약들이 온 산 천지를 수채화 물감이 되어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몸에 좋다고 하면 식품으로 약품으로 가공해서 비싸게 판매가 되고 있는 요즘이고 보면 나는 한 100년은 더 살아야하지 않을까싶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 모퉁이에는 오래된 아름드리 벚나무가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쑥이 보일 때쯤이면 등교할 때 마다 나는 그 아름드리 벚나무에 꽃이 피길 간절히 바라곤 했었다. 벚꽃이 활짝 필 때쯤이면 봄 소풍을 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순전히 멍울진 벚꽃의 개화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등교를 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소풍이라고 해봐야 뛰놀기 좋은 골짜기 산등성이에 모여 보물찾기, 수건돌리기, 장기자랑, 노래 자랑, 등을 하며 왁자지껄 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복동아. 친구랑 사이좋게 갈라 무으라.”며 엄마가 바리 비라 싸주신 삶은 달걀, 밤, 사이다, 김밥 등을 까먹으며 자연 속에서 뒹굴 땐 ‘오늘이 영원하길...’ 천국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앞장세우고 친구들과 어깨동무 하며 뉘엿뉘엿 석양을 배경으로“오늘 소풍 재밌었네. 쾌지나 칭치나네. 내일부턴 공부도 좀 열심히 하세. 쾌지나칭칭나네....”를 목청껏 부르며 돌아오던 소풍 길은 ‘오늘이 영원하길....’ 천국이었다. 50을 넘어선 지금도 벚꽃이 필 때면 친구를 선생님들.... 아! 가슴이 설레 인다.

여름.

여름이 오면 동네 앞을 흐르는 잔잔한 냇가가 개구쟁이들의 주 놀이터였다. 노는 재미에 땀이며 흙으로 범벅이 되면 줄행랑을 치듯 뛰어가 갈피리, 미꾸라지 등의 물고기를 쫓으며 물장구치고 놀았다. 그렇다고 여름밤을 시원하게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좋은 기억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징그러운 기억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 뱀에 대한 기억이다.

콩밭에서 엉켜 또아리를 틀고 위협적인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기겁을 하여 줄행랑을 쳤다. 고무신 한 짝이 벗겨진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저렇게 모여 있지? 가족일까? 친구일까?” 결국 소나무 작대기를 들고 벗겨진 고무신을 찾아 신고 사방을 경계하며 다시 돌아갔다. 하나!, 둘!, 넷!, 여섯!.....일곱! 먼발치에서 세어본 일곱 마리에 뱀 식구들, 그렇게 한참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데 늘어진 엿가락 같은 몸을 쭉쭉 뻗어 밭두렁 돌 틈새로 사이좋게 들어가는 갔다. 정겹게 혓바닥 날름거리는 인사고 없이... 그 후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콩밭을 지나가야 할 때면 작대기로 사방을 후려치곤 했었다.

가을.

가을하면 우선 탐스럽게 익은 열매들이 신나게 했다. 꽉 찬 주둥이를 힘겨운 듯 벌린 밤송이들, 통통한 칡, 도깨비가 아무도 몰래 따먹는다는 깨금(개암), 그래도 주렁주렁 열려 있는 까만 산머루를 보면 어른들의 말한 ‘애 장터’에 대한 이야기가 무섭게 떠오르곤 했다.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지 않고 땅을 파서 아이들 묻고 그 위를 삿갓을 씌우듯 바위로 눌려 놓는데 한 해가 지나면 그 바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산머루 줄기들이 뒤덮는 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좀 꺼림직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을 발견한다는 것은 마법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머루를 따먹다보면 그 맛에 도취되어 ‘애 장터’고 뭐고 한나절이 금방 갔었다. 옷이며 입술이며 달작 지근, 지상 최고의 요리사도 그리 쉽게는 흉내 낼 수 없으리라!
그리고 가을이면 뭐니 뭐니 해도 메뚜기에 대한 추억이 있다. 언젠가 퇴근한 남편이 맥주 한잔하자고해서 거실에 아이와 둘려 앉은 적이 있었다. 안주가 포장된 메뚜기볶음이었다. 아이가 하나 집어먹어보더니 “고소하다.”더니 식재료가 메뚜기라는 사실에 화들짝 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가을날의 꼬맹이는 학교가 끝나면 가방은 마루에 던져놓고 동네개구쟁이들과 약속이나 한 듯 산으로 들로 몰려다니지 않으면 메뚜기를 잡으러 벼를 묶은 나락단 사이를 종일 헤매고 다녔다. 사이다 병이나 삼베 주머니를 한가득 잡으면 엄마가 내 조막만한 손에 20원을 지워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각광받은 반찬으로 저녁상에 올라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한몫하곤 했다. 그런 다음날 학교등교 길은 남부럽지 않은 20원의 특권이었다.
5원짜리 뽀빠이 몇 봉지로 나보다 한 뺌 하나 더 큰 친구들을 거느리고 ‘오물오물’ 보란 듯이 빨,주,노,초,파,란,보 별 사탕을 ‘오드득 오드득’ 한 입에 털어 넣곤 했었다.

겨울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오면 내 기억의 우선은 온돌방과 겨울밤에 대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타닥타닥 장작 군불을 지피시던 어머니 덕분으로 절절 끓던 온돌방. 오래 앉아있으면 거울에 비친 엉덩이가 빨갛게 익을 정도로 뜨거운 아랫목에 등대고 누우시며 주문처럼 반복하시던 시원하다는 어른들의 말은 어린 나에게 꽤 긴 시간 동안 의문이었다. 그리고 겨울 산속의 밤은 도시보다 어둠이 깊고 길며 차가웠다. 그래서 휘적휘적 흔들리는 등잔불 밑에 온 가족이 화롯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고구마를 구워먹고 시루떡에 왕 대감 홍시를 찍어 먹으며 부엉이 우는 밤을 놀려대곤 했다. 흰눈이 소복이 쌓인 성탄절 새벽 기도 길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서의 썰매타기, 동네 편을 갈라 신나라 던져대던 눈싸움,
하프처럼 얼려있는 방앗간의 탐스러움 고드름을 차지하기위한 까치발 쟁탈전, 눈 마차라며 온 동네를 태워주던 큰 오빠의 엉성한 나무수레, 봄까지 제 몸을 녹여가며 집 앞을 지켜주던 눈도 삐뚤 코도 삐뚤 입도 삐뚤 눈사람, 넘어지고 자빠지고 코피까지 터지면서도 즐거웠던 그리운 날들! 다시 한 번 그런 날이 왔으면 ... 하지만 이젠 산골 아이들도 누리기 힘든 동화속의 전설이 되 버린 느낌이다.

에필로그

그때는 세상은 어디나 다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엔 피땀 흘려 가꾸고 가을엔 잘 영근 알곡들을 추수해서 추운 겨울을 나고 또 이듬해 지을 농사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우리 집 앞마당이 제일 넓고 아래채, 위채, 사랑채까지 있었던 기와집인 우리 집이 제일 큰집 인줄 알았다. 나는 기억속의 마법 같은 동네 부잣집 셋째 딸, 그 골짜기가 세상 전부의 모습인줄 알았던 소녀였다. 큰 오빠에 딸인 혜린이가 처음 도시로 구경나왔을 때였다. “아빠 ,아빠, 도시 사람들은 닭을 많이 키우나 봐요? 웬 닭장이 저렇게 많아? ” 차창 밖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내뱉은 조카의 한마디가 우리가족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었다. 결국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 나는 가난한 농부의 딸,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아파트를 보면서 웬 닭장이냐고 묻는 산골 이이가 불쌍한 건지 방과 후면 지친 몸을 이끌고 부모의 명령대로 속셈, 외국어, 컴퓨터,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등 수개의 학원을 족히 끌려 다녀야만 하는 도시 아이들이 가여운 건지 모르겠다. 끌려 억지로 다닌 학원도 어른이 되었을 때 그리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내 아이에게는 나의 어린 시절처럼 자라게 하지 못한 것이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유감이라면 유감이다. 하지만 집 옆 민주공원 있어 나름대로 자연에 대한 추억을 조금이나마 준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다.
힘 빠지고 맥 빠지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허탈한 웃음이라도 아쉬운 날이면 나는 아련한 추억 속 여행을 떠난다. 그래도 흰머리가 한올한올 늘어가메 지난날의 추억이 절실해지는 것이 좀! 야속할 뿐이다. 언젠가 추억이 많은 사람은 치매 걸릴 확률도 낮다는 연구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럼 비싼 보약보다 추억을 만들려 산이며 강이며 나가자고 남편을 졸라야하나? 인간은 그렇게 지난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추억하며 살아가야한다는 말이겠지.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간다고 좋아하던 내 아이도 먼 훗날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겠지. 부디 인정하고 공유하고 배려하는 눈부신 젊은 날들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포기하기보다 슬기롭게 극복하며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이다.

<필자 프로필>
▲경남 산청출생 ▲물소리문학회 회원 ▲현대시 문학회 회원 ▲문회복지)여섯줄사랑회 회원 ▲지방문화수호연대 회원 ▲이주노동자한글교실 훈장.


<시1>
제목
그 소녀-엄마가 되어

운동회 연습.
요리보고 쿵쿵...
조리 봐도 쿵쿵....
알수 없는 둘리 둘리 ......
경쾌한 반주에
팔딱 팔딱 뛰는 모습.

머리엔 커다란 해바라기 꽃 핀
까치,
까치발을 내밀며
손가락으론 하늘을 가리키는
네 귀여운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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