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마니아’마저 등돌린 ‘에로’?

에로영화 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다. 95년 정점을 달리던 에로영화 산업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향곡선을 그려, 최근엔 아예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 야동은 물론이고 불법 다운로드가 인터넷 상에서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술성은 사라지고 스토리 없이 노골적인 벗기기 경쟁이나 ‘낚시성 제목’ 앞세우기만 급급, 고만고만한 에로물들이 넘쳐나는 것도 에로 산업의 하향을 부추기는 원인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한때 비디오대여점 전체 매상의 30%를 책임지며 성인문화를 주도했던 한국의 에로영화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것. 이에 본지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한국 에로산업의 현주소를 취재해봤다.

▲ 영화 '색화동'의 한 장면.

에로 비디오나 DVD를 빌리기 위해 얼굴을 붉히며 비디오방에 갈일이 없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간편하게 성인용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집에서 다운받아 보거나 포르노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네티즌들 사이에는 이미 야동이나 불법 다운노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노골적 벗기기 경쟁, 제목 앞세우기만 급급, 미디어 변화에 불법다운로드 까지
매체 범람 속 무엇을 ‘에로’로 선택해야 하는지, 장르적 규정부터 다시 해야

미디어 발전의 피해자는 에로?

사실 95년만 해도 한국 에로비디오는 흥행 가도에 있었다. ‘왕가슴 미녀스타’ 진도희를 앞세운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웬만한 직배 영화 대작 타이틀과 맞먹는 2만5000장을 팔아치우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을 본 따 ‘꽈배기 부인 몸풀렸네’, ‘자라부인 뒤집혔네’와 같은 수많은 부인 시리즈 아류작들도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바람을 타고 해외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된 ‘성애의 여행’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고 비디오로 옮겨 탄 ‘애마 부인’은 장장 13편까지 이어졌다. 한 달 평균 20여편의 신작이 쏟아져 나왔고 1만개 이상 팔리는 대작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2000년 초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에로영화 산업은 그 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유호프로덕션, 한시네마타운, 클릭엔터테인먼트, 씨네프로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이저 제작사들 역시 3~4년전부터는 한편의 신작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제작을 접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유호프로덕선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에로 영화는 더 이상 안 찍는다”며 “집에서 인터넷으로 보면 되는데 누가 비디오를 빌려 보겠냐”고 말했다. 현재 유호프로덕션은 에로영화 대신 다른 미디어를 통해 성인영상을 찍고 있었다. 여기에 한시네마타운, 클릭엔터테인먼트, 씨네프로 등은 본지 확인결과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았다. 속칭 ‘16㎜ 비디오’로 불리는 에로영화는 이제 더 이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2000년대에 들어서며 에로 영화 산업은 쇠퇴기를 맞았다. 여기에 실제 상황인 ‘O양 비디오’가 CD로 유포되고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무지막지한 ‘야동의 바다’가 열리면서 에로비디오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든 것. 2002년 이후 에로비디오는 편당 500개도 팔기가 어려워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게다가 ‘박하사랑’, ‘반지하의 제왕’,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등과 같은 ‘낚시성 제목’을 앞세운 고만고만한 에로물도 영화 산업의 하향을 부추겼다. 예술성은 사라지고 스토리 없이 노골적인 벗기기 경쟁으로만 일관한 영화는 주 수요자인 ‘에로 마니아’ 마저도 고개를 돌리게 된 것이다.

살고 싶으면 정체성 확인부터?

그렇다고 에로 영화 산업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과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응을 위해 ‘소수정예’로 몸집을 줄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 케이블TV, 인터넷, 모바일서비스 등을 통해 여전히 에로영화를 접할 수는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에로업계 관계자는 “그나마 2000년대에 들어선 야동으로 재미를 좀 봤다”며 “지금처럼 불법으로 다운로드를 받는 사람도 없었지만, 인터넷을 잘 모르던 어른들이 뭣도 모르고 유료가입을 해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가지 않았다. 불법다운로드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돈을 주고 다운받는 게 오히려 바보(?)인 시대가 온 것이다. 거기다 성인사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다 보니 그나마 없는 살림에 숟가락이 늘었다. 업체들은 그야말로산 입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실정인 것. 그는 “인터넷부터 모바일까지 널리고 널린 게 에로물”이라며 “요즘엔 집에서도 찍어 올리는 사람도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에 따른 제작비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 때 2~3만원선이던 16mm 필름이 디지털로 찍게 되면서 테이프 값이 4~5000원으로 줄고, 1000~3000만원대 제작비로 일주일에 걸쳐 촬영하던 60분량을, 이틀에 500~700만원 선이면 찍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수요에 따른 공급현상이었던 것. 수요가 많지 않으니 수입은 줄어들고 이에따라 제작비비를 절감 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에로 영화 감독은 “케이블 TV에 납품하거나 온라인, 모바일 업체의 수요에 맞춰 에로물을 제작 한다”며 “업체들이 재촉을 하는데다 기간이 정해져 있어 무조건 빨리 많이 찍는 게 능사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영화의 수준도 떨어지고 있다. 비슷한 장면으로 도배를 하거나 소위 ‘행위’만을 위한 에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작가도 없어 다른 영화를 ‘짜집기’ 하거나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되는대로 찍기'를 감행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제작비절감 차원에서 스탭을 줄이다보니 영화의 전문성도 떨어지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선 에로 영화 산업의 하향 원인을 미디어의 발전보다는 에로 영화에 몸담고 있는 종사자에게 두는 사람도 있다. 먹고살기에 급급해 물질만을 추구하다보니, 스스로의 질을 스스로가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현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에로영화 감독도 있다. 특히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으로 음지에 있던 ‘에로’라는 장르를 양지로 올린 봉만대 감독은, 대중적 성공을 거뒀음에도 여전히 에로 영화를 찍고 있다.

특히 봉감독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에로 영화 산업이 발전하려면 창작 태도가 먼저 변화해야 된다고 언지 했다. 그는 “영화 장르로서 ‘에로’에 단어적 힘이 없다. 문화가 먼저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해야 되는데 산업이 먼저 나가고 문화가 뒤쳐지는 버퍼링 문화가 형성돼 있다”며 “주먹구구식으로 영화를 만들 게 아니라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양한 매체가 범람하는 속에서 관객들은 물론 만드는 사람도 대체 무엇을 에로 영화로 선택해야 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에로’라는 장르적 규정부터 다시 해야 된다”며 “예컨대 여성의 성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시장성이 떨어 질까봐 남성의 성에만 치우친 영화만을 고집하는 것 역시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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