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간첩 이수근 사건’

“피고는 이제 법정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가도 좋습니다” 2008년 12월1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의 박형남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자, 박수가 금지된 법정에서 진심어린 ‘축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난 1969년 3월 ‘위장 간첩 이수근’의 간첩행위와 도피를 도운 혐의로 구속된 외조카 김세준(62)씨의 재심 공판에서 무려 40여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기 때문이다. 또 김씨는 지난 6월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에 본지가 40여년 만에 억울한 간첩 누명을 벗고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까지 받게 된 김세준 씨를 직접 만나 1969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위장 간첩 이수근 사건’에 대해 재구성해보고 그의 심경에 대해 직접 들어봤다.


▲ '이수근 간첩사건'을 보도한 1969년 2월14일자 조선일보

1967년 3월22일. 제242차 군사정전위원회 본 회의가 끝나갈 무렵, 취재차 판문점에 나와 있던 한 기자가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다. 그는 북한의 관영 중앙통신사 부사장인 이수근이었다.

귀순 직후 그는 “나는 누구의 납치나 유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결심으로 자유를 찾았다. 나는 지식인들을 야만적으로 취급하며 사람들에게 정치적 감투를 씌워 오금을 못펴게 들볶는 북조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남한으로 귀순한 이유를 밝혔다.

자유를 찾아 떠나왔지만…

중앙정보부 등 군사정권의 주도세력은 북한 관영 언론기관인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의 귀순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김세준 씨는 “보통 귀순자들은 일정 기간 동안 안가에서 관계 기관의 조사와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지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낱낱이 언론에 공개됐다”며 “이는 당시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판문점 통해 귀순… 이틀 후부터 ‘반공강연’·‘TV좌담회’ 등에 참석
중정서 작성한 원고로 강연 강요…‘사실 아니다’ 등의 이유로 거부

이수근의 이용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정부와 중정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데리고 다니며 각종 ‘반공 강연’을 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중정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 미리 작성한 ‘원고’를 이씨에게 건네주며 당시 공화당의 정권안보에 이익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원고를 본 이씨는 “유치하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며 원고를 비판하며 원고를 거부해 중정과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켰다.

훗날 이씨는 외조카인 김세준 씨에게 “나는 위기의 상황에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남으로 넘어왔을 뿐”이라며 “나는 반공투사가 되어 군사정권의 정권안보를 위해 헌신하려고 월남한 것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수근은 귀순 후 이태원 소재의 한 외국인 주택에 거주했다. 이씨는 이곳에서 중정 요원 한명, 가정부 한명과 거주했다. 중정 요원이 이집에서 거주한 이유는 수시로 이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김세준 씨의 증언이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이수근은 자신을 감시하는 중정의 이러한 시선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이곳에서의 ‘안가 생활’을 마치고 이수근은 이문동 근처의 일반 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이사 후에도 중정의 ‘감시’는 끝나지 않았다. 당시 이씨의 집에는 언론인들도 자주 방문했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방문했고 중정은 집에 출입하는 사람의 신상을 낱낱이 파악했다.

이수근과 중정의 마찰이 극에 달한 시점은 이씨가 작성한 수기가 중정에 의해 전량 폐기 처분되면서였다. 이 책은 의례적인 김일성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의 내용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일종의 ‘논문’이었다.

북한 공산당의 회의 내용을 기록한 내용 중 ‘이미 박정희 후보의 재선을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며 이를 위해 남한 정부는 벽촌까지 정보망 체계와 공화당 조직체를 통해 많은 선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특히 문제가 됐다.

이 내용은 양대 선가가 끝난 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이를 규탄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뇌관’을 건드린 셈이었다.

김세준 씨의 말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이수근은 중정 감찰실에서 온갖 모욕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세준 씨는 “외삼촌이 당시 감찰실장에게 불려가 ‘너 빨갱이지’라는 폭언과 함께 권총을 외삼촌의 발밑에 쏘아 위협당했고 이에 혼비백산하며 집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후 그는 “중앙정보부는 무서운 곳이야 언제든지 나를 감옥에 쳐 넣을 수도 있어”라는 말을 했으며 “여기(남한)도 자유가 없기는 북한과 마찬가지야. 참으로 무서운 사회이다”라는 넋두리를 외조카에게 자주 하곤 했다. ‘권총 위협 사건’ 이후 이씨는 중정에게 받은 폭력의 후유증으로 몸이 아팠으며 술로 밤을 지세는 날이 많았다.

제3국으로 탈출, 그러나…

김세준 씨의 말에 따르면 이수근은 북한에서도 ‘일방적 김일성 찬양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위기까지 몰렸으며 이로 인해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해 대만민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한 땅에도 그가 바라던 자유는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탈출을 결심했다.

1969년 1월27일 월요일 이수근이 외조카 김세준을 ‘원호청’ 앞으로 불러냈다. 김씨가 약속장소에 나가니 이수근과 그의 또 다른 친인척인 ‘배경옥’이 함께 있었다. 이들 셋은 ‘나가시(자가용의 영업행위)’를 타고 한일은행 중부 지점으로 향했다. 이수근과 배경옥이 은행으로 향하면서 배씨는 김세준에게 “사돈 이것 좀 잘 보관하고 있어”라며 서류 봉투를 맡겼다.

궁금한 마음에 김씨는 이 서류 봉투를 열어봤다. 봉투안에는 ‘오재영’이라는 이름의 여권이 있었으며 변장한 모습의 이수근의 사진이 붙어 있었으며 여권의 최종 목적지는 태국의 방콕으로 되어 있었다.

다시 돌아온 이수근은 김씨에게 “대한민국 역시 자유가 없는 곳이다. 날씨가 풀리면 중정에서 ‘3선 개헌’을 본격화 할 것이고 이게 착수되면 나에게 더 큰 고통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이수근은 “제3국으로가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내 양심에 따라 집필활동을 하고 싶다. 나는 남북한 모두에서 살아본 사람이니까 국제정세와 남북통일에 관한 글을 쓸 계획이다”고 탈출 후의 계획을 외조카에게 밝혔다.

공항으로 나갈 시간이 되자 이수근은 여권의 사진모습과 같이 변장했다. 이후 세 사람은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차가 공항에 도착하자 이수근과 배경옥만 차에서 내려 공항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이수근은 대학등록금으로 쓰라며 6만원을 김씨에게 주었다.

다음날 남한에서의 이수근 부인은 남편이 들어오지 않자 남편의 행방을 중앙정보부에 문의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도 중정은 이수근이 해외로 빠져나가 잠적한 사실의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행방이 불투명해진 이수근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중정은 김세준을 비롯해 당시 이수근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을 모조리 연행해 남산으로 끌고 갔다.

남산에 있는 중정으로 끌려간 김세준씨는 무섭게 몰아치는 언어폭력과 신체에 가해지는 야만적인 폭력과 함께 외삼촌의 행방을 묻는 중정요원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당시 김씨는 외삼촌의 잠적을 오로지 실종사건으로 간주해 조사할 줄 알았지 간첩사건으로 조작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중정 요원들은 이수근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1월27일자 출국가 명단을 모두 분석했지만 어디에서도 ‘이수근’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애매한 공항 관계자들과 외무부 직원들이 줄줄이 중정으로 끌려와 홍역을 치뤘고 이번 일과 전혀 상관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중정으로 연행되어 왔다. 그러나 어디서도 ‘이수근’의 행적을 찾지 못했고 중정요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1969년 1월 29일 수요일 오전 11시. 김세준 씨는 죄 없는 사람들이 중정으로 끌려와 생고생 하는 것이 안타까워보였고 외삼촌이 원하던 목적지에 충분히 도착했다고 판단, 중정요원들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외삼촌이 ‘오재영’이란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었고 목적지는 태국에 방콕이라는 것을.

사실을 털어놓자 중정요원은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말 것”을 김씨에게 위협조로 당부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모든 사실을 내가 말해준 것이 아닌 중정의 수사로 인해 찾아낸 것으로 꾸미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 중정 요원들은 김세준에게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0여 차례나 본인이 직접 작성한 진술서로는 그를 구속시키기에는 적당한 문구가 없자 중정요원들이 직접 진술서를 작성해 놓고 불러주며 받아쓰도록 강요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정요원들은 여러 명이 빙 둘러서서 샌드백 치듯 김씨를 폭행했고, 진술서를 쓰는 와중에도 조금의 머뭇거림이 있을 시에는 어김없는 주먹세례가 날아왔다.

한국에서 사건의 조작이 시작될 무렵 이수근은 홍콩에 있었다. 27일 홍콩에 도착한 후 유유자적하며 지내다 29일 오후에 이수근은 행선지를 캄보디아로 변경해 프놈펜행 CPA기에 몸을 싣기 위해 카이탁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던 중정 요원들은 공항에 잠복해 있었고 이수근은 발각되어 몸싸움을 벌이다 결국 중정 요원들에게 채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됐다.


검사님, 연극 그만 하시죠

1967년 3월22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은 ‘이수근 간첩사건’을 발표했다. 발표문의 요지는 월남한 이수근은 탈출 당시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음에도 북괴 거물급 언론인이라는 이유로 순회강연 등을 다녔으나 김일성을 비난하는 논지를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북괴 학정의 핵심을 폭로하는 일이 적어 그를 내사하는 과정에서 배경옥과 함께 해외로 탈출을 시도하던중 검거됐다는 내용이었다.

수기가 중정에 의해 전량 폐기… ‘온갖 폭력’과 ‘권총 위협’도 받아
‘항소 안하면 살려줄 것’이라 회유… 사형이 집행되리라 예상 못해


중정의 이러한 ‘이수근 간첩사건’에 대한 발표에 김세준 씨는 많은 반론을 제기했다. 김씨는 “간첩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그 흔한 암호문 한 장도 외삼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그가 탈출 당시 가지고 있던 것은 영한사전, 한영사전, 기초영문법, 중국어 4주간의 책뿐이었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외삼촌이 위장 귀순한 간첩이라면 오히려 남한 정부에 아부하는 것이 간첩 활동에 더 유리한 방법이었음에도 외삼촌은 자신의 소신껏 강연 등을 펼친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며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오로지 그의 성격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969년 3월22일 ‘이수근 간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법정의 분위기는 위압적이고 재판은 마치 시간에 쫓기기라도 하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부분의 질문 내용들은 피고인의 유죄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재판관은 피고인들에게 다른 말은 하지 못하게 하고 묻는 말에만 예 혹은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도록 했다.

진실을 밝히는 재판정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중정의 수사 내용을 위한 하나의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4월24일 2차 공판이 있었고 5월2일에는 구형, 5월10일에는 선고가 내려졌다. 선고에서 이수근은 사형을, 김세준은 징역 6년을 언도 받았다. 법정의 사진 기자들이 취재 열기에 빠져 있는 사이 한 기자가 이수근에게 항소를 권유했고 이에 대답하듯 이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항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항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정과 재판부는 ‘이수근이 항소를 포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세준 씨는 “외삼촌 수감되어 있던 감방 앞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중정 요원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며 “이는 외삼촌을 타인과의 접촉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로 인해 외삼촌은 항소의 의사를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1969년 7월2일 오전 11시 이수근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형이 확정 된지 2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일부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이수근은 사형이 집행되는 날에도 자신에게 형이 집행 될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사형장 안으로 들어서서도 이수근은 집행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자신의 눈을 덮는 보자기가 씌워지자 이수근은 “검사님, 이제 연극 그만하지죠”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형을 의심하며 형장에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실에 대해 김세준 씨는 “아마도 검찰이나 중정 쪽에서 ‘항소를 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 뒤 사형만은 면해 주겠다’는 등의 말로 외삼촌을 회유 한 것”으로 보이며 “이 말을 믿은 외삼촌은 사형만은 집행되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고 이로 인해 사형 당일 검사에게 이 같은 말은 한 것으로 보여 진다”고 전했다.

이수근이 형장에 이슬로 사라진지 40여년이 흐른 2006년 12월26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김세준 씨에게 ‘이수근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공식 결론을 내렸다.

이에 김씨는 2007년 2월26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같은 해 11월9일 서울 고등 법원은 재심대상판결을 결정했다.

재심과정에서 김씨는 “외삼촌인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귀순자이며 자유를 찾아 왔지만 중정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억압 등을 당했으며 3선 개헌 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자신의 대한 압박이 더 강해질거라는 것에 위기를 느끼고 제3국으로 떠나려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나는 외삼촌을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온갖 회유와 강압에 못이겨 중정 요원이 불러주는 대로 허겁지겁 작성된 거짓 진술서를 작성한 것”이라며 외삼촌과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2008년 12월19일 서울고등법원은 “중앙정보부의 불법 행위와 구타 등으로 인한 자백으로 잘못된 정치 수사”였다며 김세준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검찰에선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2008년 12월27일 김씨는 무죄가 확정됐고, 아울러 지난 6월3일에는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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