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말하기 전까지는 쉬쉬(?)

타인의 생명보험 계약시 자필서명 여부를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보험자의 자필 서명이 들어가지 않은 계약서가 원천적으로 ‘무효 계약’이 되는 탓이다. 이 같은 ‘무효계약’의 경우 수십년 보험료를 고스란히 내고도 보험금을 못타거나,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보험사는 이 같은 ‘무효계약’에 대해 철저한 관리는커녕 고객 항의 이전까진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보험설계사가 “서명 안 해도 괜찮다”고 설명하는 사례까지 있다. 신한생명보험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A씨의 사연을 들어봤다.


자필서명 없는 원천 무효 계약서, 단체계약에선 알고도 모른 척?
수십년 뒤 무효처리 되도 지급된 보험금 이자는 보험사가 ‘꿀꺽’

부부, 가족, 친지 앞으로 생명보험을 들어놨다면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자칫 사고가 일어났을 때 보험의 보장은커녕 고스란히 소송을 당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의가 필요한 것은 생명보험사가 계약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무효 계약’을 당사자의 문제제기가 있기까지, 혹은 보험금 지급 이전까지 묵인하는 경우가 태반이어서다.

피보험자 사인 필요없다?

A씨는 2006년 4월 모백화점에서 근무하던 중 홍보를 위해 나온 신한생명보험 상품을 파는 보험설계사에게 단체로 보험 상품 설명을 받았다. A씨는 부부가 같이 가입하는 저축형 보험이 하나 쯤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당시 계약서를 작성하던 A씨가 계약서 구석 남편의 서명란에 대해 문의하자 보험설계사는 “일단 쓰고 나중에 남편 분께 자필서명 했냐는 확인 전화가 간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게 일러둬라”고 설명했다. A씨는 보험설계사를 믿고 A씨와 남편의 서명란에 자신이 서명을 했다.

이 경우 이 계약은 합법적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A씨가 가입한 보험은 타인의 생명보험으로 분류된다. 타인의 생명보험이란 보험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른 경우다. 즉 자기 자신의 보험이 아닌 제3자를 피보험자로 해 체결하는 보험으로 부부가 같이 드는 생명보험이나 자녀, 부모님 등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이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현행법상 보험 당사자의 서면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A씨의 경우 A씨가 남편의 서명을 대신한 것이 법률상 인정되지 않는다. 때문에 만약 A씨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험금을 지급받을 일이 생긴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단적으로 부산지법 제9민사부는 지난 6월10일 손보사가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보험사가 보험계약서에 B씨 남편, 피보험자의 서면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때까지 B씨는 모든 납입금을 내왔다. 멀쩡한 계약인 줄 알았는데, 자필서명이 문제가 돼 결국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결국 당사자 서명 없는 타인의 생명보험은 보험금을 몇 년 납부하더라도, 얼마를 납부하더라도 고스란히 법적으로 보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견해다. 체결 단계서부터 ‘무효’인 계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험업계는 이런 ‘무효계약서’가 가입당시 제지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전한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무효계약을 방지하기 위해 보험사에서 피보험자에게 전화해 직접 서명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만 보험설계사 이에 대한 대답까지 지시했다면 사실상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실제 A씨의 경우에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는 동일한 필체의 서명이었지만 신한생명 측은 계약당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단체에서는 보험설계사가 A씨에게 판매한 신한생명의 상품을 부부가 함께 있기 쉽지 않은 직장에서 홍보한 이유와도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보험소비자협회 김미숙 대표는 “자필서명이 안된 계약서가 있어도 보험사에서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보험설계사의 실적에 대한 욕구와 보험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보험사가 ‘무효계약’에 대한 환불시 이자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보험 표준약관이 있다. A씨 역시 ‘무효계약’임을 눈치체고 신한생명으로부터 보험 원금을 환불 받을 수 있었지만 약 2년 동안 200만원이 넘는 금액을 낸 것에 대한 이자는 받지 못했다. 한 해 물가상승률과 금액에 대한 기회비용, 금리를 계산했을 때, 오히려 손해를 본 셈이다.

김 대표는 “‘무효계약’ 자금을 유통하며 얻은 수익은 고스란히 보험사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며 “결국 ‘무효계약’이 생겨도 고스란히 보험사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애써 근절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신한생명은 A씨가 가입했던 백화점 설명회에서 이뤄진 계약체결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이뤄진 집단계약의 대부분이 ‘무효계약’일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신한생명 홍보팀 관계자는 “우리가 일일이 서명을 대조해서 서명의 필적을 비교할 수는 없다”면서 “고객에게 계약 철회 민원이 들어오면 그때 처리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백화점에서 이뤄진 ‘무효계약’을 자발적으로 철회했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2년이 지난 사안이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궁색한 답변을 내놨다. 결국 피보험자가 인지 못한 ‘무효계약’은 그대로 남아있는 셈이다.

미래의 위험요소 ‘무효계약’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보험금을 지급 받게 될 때다. 수년 혹은 수십년 뒤 이들의 보험금 지급일에 ‘무효계약’임을 보험사가 주장한다면 보험금이 절실한 상해, 질병, 사망 등의 상황에서 소비자는 그냥 원금만 받게 될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보험료를 굴려서 얻은 실익은 고스란히 보험사의 수익이 된다.

김 대표는 “계약자가 인지하지 못한 ‘무효계약’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클 것”이라며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 오히려 미래의 위험요소가 되는 격이다”라고 평가했다. ‘무효계약’에 대한 보험사의 보다 각별한 관리와 책임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타인의 생명보험’어떻게 주의하나

▶ 미성년자 보험의 경우는?
민법 5조에 따르면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함에 있어서 친권자 및 법정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친권자라 하면 부모를 모두 일컫는데, 부모가 이혼하거나 사별하지 않은 이상 부친과 모친의 서명을 모두 받아야 한다. 이중 하나만 빠져도 ‘무효 계약’이다.

▶ 서명확인서로 ‘무효계약’이 ‘유효계약’되나?
일부 보험사에서는 서명확인서를 통해 피보험자의 미서명 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소비자에게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상법 제731조 1항에 따르면 피보험자가 서면으로 동의의사를 표하는 시점은 보험계약 체결시점까지다. 때문에 이후에 서명을 해도 여전히 그 계약은 무효다.

▶ ‘무효계약’을 모르고 해약한 경우에는?
당시 받은 해지환급금만이 아니라 지급된 보험료를 모두 돌려받을 수 있다. 계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인 만큼 사업비와 위험보험료 등이 공제된 금액도 환급이 가능한 것. 특히 시민단체 측에서는 이에 대한 이자까지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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