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박경리 선생 타계

▲ “하늘의 토지에서…”‘박경리 선생님!/ 이제 오르시는 새 하늘 새 땅에서도/ 더 큰 붓으로 더 높은 산 깊은 강 지으시어/ 따르는 이들의 빈 가슴 채워주소서/ 부디 사랑의 손길 한 번 더 잡아주소서’ -고인의 영전에 바치는 조시 ‘하늘의 토지에서 더 높은 산 지으소서’ 중
‘토지’의 대모 소설가 박경리씨가 지난 5일 타계했다. 박씨는 지난해 7월 폐암을 선고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포기, 강원도 원주에서 요양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를 보여 서울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나 증세가 악화돼 지난 5일 오후 2시45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와 정치인, 문인, 연예인 등 각계 인사들이 찾아 조문했다. 이들은 “선생의 타계는 한 작가의 죽음이 아니라 한 연대기의 극적인 종언”이라며 “비록 선생이 잠들더라도 <토지>는 영원히 그의 넋을 이어갈 것”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그가 2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엮어낸 <토지>는 문학작품이기 전에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역사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한국근대사 아우른 <토지> 소설가 박경리 ‘토지’ 품으로
어둡고 아팠던 가정사, 굴곡진 삶…수많은 작품으로 승화
25년만에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 한국문단의 ‘토지’ 돼
문단의 ‘거목’, 세월도 한도 잊고 한줌 흙으로 스러지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박경리 2008.4.)

소설가 박경리씨는 타계 전 발표한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을 통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갔다.

2003년 토지의 후속으로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건강 악화로 세 차례 만에 원고지 440여장 분량으로 중도에 그만둬야 했던 한이라도 풀 요량이었을까. 박씨는 지난 3월 8년 만에 ‘까치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 창작열을 불태우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밝혔다.

“행복했다면 문학도 없었다”

박경리씨는 1926년 10월28일 초저녁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병인년 호랑이띠. “초저녁은 호랑이가 한창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여서 기가 센 사주”라는 말처럼 굴곡진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네 살에 네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해 열여덟에 박경리를 낳은 아버지는 박씨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박씨가 아버지를 좋아했을 리 만무했고 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특히나 아버지에게 학비 문제로 대들었다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진주여고를 다닐 때는 학비를 보내주기로 했던 아버지가 학비 부담을 어머니에게 미루자, 아버지를 찾아가 따지다 맞았던 것.

그 시절 박씨에게 문학은 유일한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 후일 그는 “책을 미칠 정도로 좋아해 누가 책방에 돌려주는 책이 있으면 싹싹 빌어서라도 책을 손에 넣고선 밤새 읽고 돌려주곤 했다. 하룻밤 새 책 세 권을 읽고 새벽녘에 새빨개진 눈을 껌뻑거리던 기억도 생생하다”며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회고했다.

1946년 김행도씨와 만나 어두웠던 가정사의 그늘을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6·25전쟁 난리통에 사별의 아픔을 겪는다.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가슴에 묻어야 했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을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던 것이 그가 문학으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김동리 선생은 “시보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고 1955년 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발표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1994년 8월까지 25년이란 시간에 걸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인간의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한국문학의 대표작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파란만장은 삶은 그를 작품 세계로 내몰았다.

역사적 대서사시 ‘토지’

▲ ‘귀천’한민족의 굴곡진 삶을 담아낸 ‘토지’를 안고 소설가 박경리씨가 하늘로 돌아갔다. 힘겨웠던 자신의 삶마저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영전 앞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박씨의 대표작이자 한국문단의 판도를 바꿔놓은 대작 <토지>. 그러나 그 시작이 처음부터 방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경리씨는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의 소설을 써서 탈고까지 마친 후에야 세상에 공개하기로 작정했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전화도 끊고 신문도 끊고 원고 청탁도 일체 받지 않은 채 원고지를 채워 나갔지만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벗을 수 없었다.

결국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고 한 차례의 절필을 포함, 1972년 문학사상, 1977년 독서생활과 한국문학, 1983년 정경문화, 1987년 월간 경향, 1992년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가는 우여곡절 끝에 1994년에서야 원고지 3만1200장으로 펜을 놓을 수 있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25년에 걸쳐 쓴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글귀로 마무리 되는 이 이야기는 한 권 분량으로 시작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광복에 이르기까지 한국근대사를 아우르며 민족의 한을 담아낸 대서사시로 완성됐다.

“그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토지> ‘서문’ 중)라며 그 긴 세월을 돌이키게 했던 <토지>.

그 소설은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을 넓은 공간적 배경과 깊고 넓고 치밀한 스토리 구성, 700명이 넘는 인물의 개성과 성격, 세세한 심리묘사는 작품성과 함께 탁월한 대중성도 확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겨레의 재산’, ‘노벨문학상을 우리에게 안겨줄 유일한 작품’ 등 전문가들의 찬사 속에 드라마와 서사 음악극, 영화 등으로 각색되는 한편, 전 5부 완간 이후에는 집필 장소가 문학공원이 되고, 인터넷에 토지의 독자들로만 이루어진 많은 사이트가 개설됐다.

또한 독특한 어휘와 방언, 풍속, 속담 등을 담은 토지사전이 발간됐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도 번역돼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등 <토지>는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토지서 나고 토지로 가고

박경리씨는 <토지>를 마무리 한 뒤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토지는 내 생애와 같다. 객관적인 시간으로 25년을 매달렸지만, 평생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역사관, 사상 철학, 그러한 것들이 토지에 전부 들어 있다. 소설 이상의 의미로 나와 융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토지>를 ‘칼날 위에서 쓴 작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토지>를 쓰기 시작한 이듬해 유방암 수술로 신체 일부를 도려낸 육체적 고통과 사위 김지하 시인이 구속되면서 겪은 정신적 고통이 그가 말하는 ‘칼날’이었다.

그는 유방암 수술 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글을 썼다. 병마를 이겨낸 뒤에는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필화사건으로 투옥됐다. 김 시인은 유신체제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1980년 무렵 옥바라지를 위해 원주에 있던 외동딸 김영주를 따라와 지금의 토지문학공원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박씨는 이러한 고난을 “평생의 큰 아픔이나, 분노, 육체의 고통이 작품을 쓰게 한 추진력이었다”고 말했다. “‘토지’에서 서희의 강인하고 도전적인 성격은 작품을 쓸 당시 내 심정의 일부가 스며든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지>에 대해 한 문단 관계자는 “박경리 선생은 한국문단을 지배해온 통속성을 문학성으로 끌어 올린 인물”이라며 “당시 한국문학의 고질적 병폐였던 통속성을 딛고 문학성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한국문학이라는 빌딩에 기초작업을 한 것”이라며 그를 ‘통속성을 탈피한 최초의 여류 소설가’로 칭했다.

<토지>의 산실 강원 원주시 치악산 자락에 토지문화관에서 낮에는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다 생전 “이곳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던 고향 경남 통영 산양읍의 미륵산 기슭 양지농원에 묻힌 박경리 작가. 문학계의 토지를 마련하고 ‘토지’의 품으로 돌아간 그의 뒤로 “영원히 <토지>의 넋을 이어갈 것”이라는 후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소설가 박경리는 누구?

1926년 경남 통영 출생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 졸업
1955년 김동리 추천으로 단편 ‘계산’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현대문학》에 추천이 완료돼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함.
1957년 ‘전도’,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현대문학》, ‘반딧불’《신태양》 등 발표,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8년 첫 장편 ‘연가’를 《민주신보》에 연재.
1958년 장편 ‘표류도’《현대문학》연재. ‘표류도’로 제3회 내선문학상 수상. 『표류도』를 대한교과서에 간행.
1962년 전작 장편『김약국의 딸들』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
1965년 ‘시장과 전장’으로 제2회 한국 여류문학상 수상.
1969년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1969~1972.9)
1972년 ‘토지’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1970~1975.10),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 수상.
1973년 『토지』를 문학사상사에게 간행.
1977년 ‘토지’ 3부를 《주부생황》에 연재.
1979년 『박경리문학전집』 전16권(지식산업사), 『영원의 반려』(명서각)출간.
1983년 ‘토지’ 4부를 《정경문화》에 연재하다 《월간경향》으로 옮겨 연재.
1989년 『토지』전12권을 지식산업사에서 출간.
1990년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가 동광출판사에서 출간. 제4회 인촌상 수상
1992년 『토지』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
1994년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16권을 솔출판사에서 완간.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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