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 박재혁 의사 사진 : 부산경찰서 푹탄 투척 의거 전날 찍은 기념촬영 사진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박재혁(朴載赫) 의사를 2008년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5월 한달동안 독립기념관 민족전통관에서 개최한다.

1895년 5월17일 부산 범일동(凡一洞)에서 태어난 박재혁의사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의사는 학생시절부터 반일 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그리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 부산공립상업학교 제4회 졸업사진(맨 윗줄 왼쪽부터 세 번째가 박재혁 의사)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의사는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시키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의열단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에 대한 보복으로 폭탄과 군자금을 건네주며 박재혁 의사에게 거사를 권유하였다.

1920년 9월14일, 고서(古書)를 파는 중국인으로 가장한 박의사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을 던졌다. 박의사는 부상을 당한 채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으나 중상을 입은 하시모도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짐으로써 거사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써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시작으로 최수봉(崔壽鳳)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김익상(金益相)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파 거사 등이 일어나 의열단의 국내 항일투쟁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 박재혁 의사 동상 사진 : 1998년에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박의사는 의거 당시 폭탄에 의한 상처와 극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독 소행임을 끈질기게 주장하여, 공모자로 지목되었던 최천택, 오택 등은 풀려나게 되었다.

결국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박의사는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고 있음에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 고 마음먹고 단식을 결행하였고, 결국 1921년 5월 방년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조선의 학생으로서, 의열단원으로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간 박재혁 의사를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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