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8년 "부활은 이제부터"

▲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외환위기 때 매각된 만도를 8년만에 되찾으며 재계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이 외환위기에 잃었던 그룹의 모태 만도를 되찾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6년 재계서열 12위에 올라있었지만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했던 한라그룹으로서는 8년만에 부활의 서곡을 울린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형제간의 분쟁을 비롯해 경영능력에 대한 세간의 눈초리도 곱지만은 않았던 것. 심지어 정 회장은 만도 인수를 앞두고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분쟁 조짐까지도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8년만에 잃었던 모태기업을 되찾은 정 회장의 어제와 오늘을 <시사신문>이 좆아봤다.

재계 12위였던 한라그룹의 몰락… 만도 되찾기까지 8년
고(故) 정인영 명예회장의 유지 “만도만큼은 꼭 인수해라”
형제간 재산분쟁, 경영능력 의구심 씻어내고 그룹 부활될까
만도 인수에 범 현대가의 지원사격, 화해 무드 시발점 되나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이 8년 만에 그룹의 모태인 만도를 인수하며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1월21일 한라건설은 만도 인수에 성공했다. 최대주주인 센세이지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 72.4%(539만1903주) 전량을 6515억원에 매입한 것이다. 간신히 한라건설로 명맥을 잇던 한라그룹을 물려받은 정몽원 회장이 지난 8년 동안 고군분투한 결과다.

확실히 만도는 국내 최대급으로 손꼽히는 자동차 부품업체로 자동차 관련 기업 중에서도 ‘알짜’다. 자동차 제동장치와 조향장치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만도는 ABS, ESP 등 제동·안전장치들을 국내 최초로 개발, 생산하고 있다. 주로 현대차에 브레이크 시스템을 공급하는 등 국내 브레이크 시장 7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 회장의 만도 인수가 각별한 것은 단순히 경영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업계에서는 오히려 한라그룹의 모기업을 되찾았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고 평가한다.

한라그룹, 재계 거물의 몰락

한라그룹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故) 정인영 회장이 1962년 세운 현대양행 안양공장(만도기계)이 모태다. 1980년 현대양행으로부터 독립한 한라그룹은 1996년에 자산 6조2000억원, 매출 5조3000억원, 계열사 18곳, 직원 2만여명을 거느린 재계 12위 그룹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IMF로 온 나라 경제가 흔들리는 통에 한라중공업에 무리하게 투자한데다 계열사 간 상호출자로 자금난에 문제가 생겨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 한라I&C 등만 남고 그룹이 와해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정 회장도 모기업만큼은 내놓지 않으려고 동분서주 했지만, 외환위기로 인한 매서운 구조조정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게 된다. 한라건설과 한라콘크리트, 투자컨설팅회사인 한라I&C 등이 살아남았지만, 그룹으로서의 면모는 심한 상처를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정 회장은 이 과정에서 계열사 상호지원 혐의로 징역 4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아 지난해 말 사면됐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정 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7년 재계 12위의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1년만에 송두리째 찢은 주인공으로 지목된 탓이다.

심지어 2003년에는 그의 형인 정몽국 전 한라그룹 부회장과 재산권을 둘러싸고 첨예한 분쟁을 벌였다. 자신 소유의 한라시멘트 주식 71만719주를 동생인 한라건설 정 회장 등이 1999년 말 임의로 타인에게 매도했다며 서울지검에 고소했던 것이다. 이어 정 전 부회장은 2005년 한라시멘트 주식의 배담금 몫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작 몰락한 그룹 오너 두 형제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으니 이를 보는 재계의 눈초리가 곱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능력 없는 오너가 몰락한 그룹 안에서 서로 밥그릇 싸움하는 양상으로 비춰진 것도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한라그룹의 몰락이 준 충격은 정 명예회장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 명예회장은 경영권 승계 이후 정 명예회장은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룹이 해체된 뒤 정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에 만도 인수를 강력히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2006년 별세할 때까지 “만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 했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의 유지를 이어 만도를 되찾은 정 회장의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계약을 체결한 다음날인 1월22일 임직원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군 용담리 정 명예회장의 묘소를 방문해 참배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의 만도 인수는 부친의 유지를 이음과 동시에 외환위기 당시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상징적인 징표로 자리매김 할 전망이다.

범 현대가와 갈등설

사실 정몽원 만도 인수에 이르는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정 회장이 2005년 만도 인수에 대한 의지를 공공연히 밝힐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돼온 것은 남도 아닌 사촌형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었다. 현대차는 만도를 인수할 경우 자동차 수직계열화를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보였다. 때문에 세간에는 만도 인수를 놓고 한라와 현대차가 경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당시 한라건설과 정 회장의 확보지분은 26.84%. 지분 중 25%만 확보해도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만도 매출의 최대 거래처인 현대차의 협조가 없으면 한라건설이 만도를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독자생존이 힘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자금력에 있어서도 막강한 현대차 그룹과 경쟁한다는 것도 정몽원 회장에게는 부담스런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왕자의 난’ 등 혈족간 분쟁으로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현대가문이 또다시 집안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까지 돌았다. 특히 의혹이 증폭된 것은 2006년 정 명예회장의 빈소에 정몽구 회장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였다.

범 현대가의 협력으로 인수

▲ 만도의 대주주인 센세이지로부터 만도 지분 매입 계약을 체결하는 정몽원 회장(가운데).
하지만 세간의 우려와 달리 최근 만도 인수에서 보여준 범 현대가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한 지원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에는 정상영 KCC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등 ‘범현대가 실세’들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정 창업주의 막내동생인 정상영 회장은 지난해 7월 정 명예회장의 1주기에서 일가족에게 “만도를 반드시 되찾아 형님(정인영)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영 회장은 산업은행, 국민연금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자금을 보충 했다. KCC는 이 과정에서 2699억원을 투자해 만도 주식 29.9%를 취득해 만도의 2대주주로 올라섰다.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준 것은 바로 정몽구 회장이었다. 실제로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현대차는 만도 대주주인 센세이지 매각 재개에도 인수의사를 철회하는 한편 한라건설 컨소시엄과 경합을 벌이던 TRW, KKR의 ‘컴포트(Comfort 물량보전)’사실상 거부했다. 대신 한라그룹에 납품권을 보장해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도의 납품에서 70%를 차지하는 현대차의 의중이 인수의 향배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결국 센세이지는 5000억원 가량이나 낮은 금액을 써낸 한라그룹에 만도를 ‘울며 겨자 먹기’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차가 한라건설이 인수에 적잖은 도움을 준 셈이다.

한라그룹 부활 할 수 있나

현재 만도는 원주인인 한라그룹 품으로 돌아오자 “다행이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만도 직원들은 외환위기 때 외국투기자본인 선세이지에 팔리면서 대규모 인력감축과 구조조정을 겪은 바 있다. 때문에 또다시 불어 닥칠지 모를 고용불안 문제로 불안감도 감돌았었다.
하지만 만도가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찾음에 따라 문막 일대 자동차부품 산업단지 조성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정몽원 회장은 지난 4일 만도 노조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 달 초부터 만도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겠다”며 “형식적으로는 인수계약이 3월 말 마무리될 예정이지만 가급적 빨리 경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2대주주 KCC가 경영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에 대해서도 “한라 컨소시엄에 참여한 업체들은 추가로 지분을 늘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분매각 때도 한라에 우선매수권을 주도록 계약서상에 명시돼 있다”고 못 박았다.

본격적인 한라그룹 태동에 들어간다고 밝히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한라건설의 독자적인 경쟁력으로 만도를 인수했다고 보기 힘든 만큼, 차후 한라그룹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직 낙관적이지 않다”면서 “만도라는 알짜가 현대그룹 부활의 초석이 될 수 있을지는 정몽원 회장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 정몽원 회장은 누구?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은 고(故) 정인영 전 명예회장의 2남으로 고대 상대를 졸업하고 1979년 현대양행에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85년 만도기계 전무, 1989년 같은 회사 사장을 거치고 1992년 한라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이어 1997년 그룹 회장에 올랐다.

정 명예회장은 이미 1994년 정 회장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여기에는 뛰어난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한라중공업 등 계열사 상호지원 혐의로 징역 4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지만 지난해 말 사면·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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