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되던 1942년 “취업시켜 주겠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1993년에 피해사실을 처음 알려
2009년 보은군에 2천만원 장학금 기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발인식이  29일 오전 경기도 광주 한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사진 /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발인식이  29일 오전 경기도 광주 한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사진 /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발인식이 오늘(29일) 오전 엄수됐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 나눔의집에 거주하며 피해자들의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이 할머니는 향년 95세로 지난 26일 별세했다. 사인은 급성폐렴에 의한 패혈증인 것으로 전해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 할머니 빈소를 찾아 조의(弔意)를 표했다.

빈소는 경기도 광주 경안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이 할머니의 사망으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단 10명만 남았다. 이중 3명은 나눔의집에 머물고 있다.

1928년(주민등록상 1930년생)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14세 되던 1942년 “취업시켜 주겠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2년 넘게 중국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1981년 귀국한 이 할머니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속리산 자락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생계를 이어갔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두 번째로 1993년 우리 정부에 위안부 피해사실을 알렸고, 생전에 나눔의집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2009년 4월에는 2천만 원을 지역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평생 동안 음식점 허드렛일과 날품을 팔아 마련한 돈이다.

당시 매체는, “팔순이 넘은 위안부 피해자가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고 밝히고 “나라가 부강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두 번 다시 나라 잃는 불행이 없도록 내 돈 전부를 미래의 주역들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라는 이 할머니의 소망을 적었다. 평소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이 할머니의 소망이 이제는 유언이 되었다.

당시 이 할머니의 거주지는 충북 보은군 사래리였으며, 4월 7일 “보은군민장학회를 찾아 지난 20여 년간 먹고 입을 것을 아껴 모은 돈 2000만원을 쾌척했다”고 매체(매일경제)는 상세히 기록했다.

2011년 국민포장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언론에 인터뷰한 이옥선 할머니의 모습 (사진 / 보은사람들 제공)
2011년 국민포장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언론에 인터뷰한 이옥선 할머니의 모습 (사진 / 보은사람들 제공)

2011년 이 일로 행정안전부의 국민추천포상심사위원회로부터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충북 보은과 나눔의집을 오가며 생활하다 2018년 이후 광주 퇴촌 나눔의집에 정착해 생활해왔다. 유족으로는 딸 김 모씨와 조카가 있다.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서려 있습니다” 라는 할머니의 필적이 우리에게 잊지 못할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나눔의 집에 남아 있는 이옥선 할머니의 필적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서려 있습니다”(자료 / 나눔의 집)
      나눔의 집에 남아 있는 이옥선 할머니의 필적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서려 있습니다”(자료 /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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