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려
이덕일, 김병기, 이시종 주제발표

일송 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가 9일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주최한 “일송 김동삼과 민족통합의 길” 학술대회에서 김경한 기념사업회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일송 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가 9일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주최한 “일송 김동삼과 민족통합의 길” 학술대회에서 김경한 기념사업회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일송 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는 오늘(9일) 오후2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일송 김동삼과 민족통합의 길”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오늘 대회에서는 주제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1주제인 “국민대표회의와 일송 김동삼”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발표했다.

2주제는 “삼부 통합운동과 혁신회의(김동삼을 중심으로)”로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이 발표했고, 마지막 3주제인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한국고대사인식”을 이시종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이 발표했다.

첫 발표에서 이덕일 소장은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상해에서 결성된 국민대표회의는 대일항전사의 물줄기를 일거에 바꿀 수 있는 큰 사건”이었으나, “대일항전사에서 임시정부 수립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임에도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소장은 당시 통일된 조직체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대일항전세력을 체계적으로 묶어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목적 하에 “수많은 논의를 거쳐 국민대표회의를 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면서 이 회의에는 김동삼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지역 및 단체 대표 158명이 참가했고, 자격심사를 거쳐 125명이 대표로 확정되었던 명실상부한 민족대표들의 회의체가 구성됨에 따라,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장장 6개월간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실로 단군의 건국기원 이래 반만 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외의 여러 지역과 단체들이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열려던 민주회의였다”고 국민대표회의의 역사성을 평가했다.

대회 주최자인 ‘일송 김동삼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김경한) 지난 4월 13일 오후 3시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창립했다. 이날 행사는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모식을 겸해 열렸다.

‘만주벌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일송 김동삼(金東三) 선생(1878~1937)은 남만주 ‘무장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일송 선생은 1914년 비밀병영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건립하고 장주(莊主)가 됐는데, 명칭은 농장이지만 비밀병영으로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부민단을 확대해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서를 설치해 군대 조직을 갖춘 정부 조직형태를 갖추었다. 이들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19년부터 신흥학교를 무관학교로 확대해 김산·김원봉·강화린 등 항일 독립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35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청산리전투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참전해 공을 세웠다. 임시정부가 군사 부문을 만주에 두려 했던 것은 이러한 선생의 무장 독립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송 선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의 화신이기도 했다. 1920년 일어난 경신참변의 참담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이에 선생은 1922년 6월 남만통일회 조직과 대한통의부 결성, 1923년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 선출, 1924년 7월 전만통일주비회 결성, 1929년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한국독립당과 독립군 조직 등 독립운동 통합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혀 본국으로 강제송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33년 3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감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1962년 일송 김동삼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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