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정기인사 총정리

재벌 그룹의 2008 정기인사가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이번 정기인사의 화두는 단연 ‘재벌 3·4세’의 경영일선 대거 등장으로 꼽힌다. 주요 그룹 사이에서 입사 때부터 초고속으로 승진해온 재벌 총수의 자녀들이 이번 정기인사에서 재차 승진하면서 승계구도를 굳힌 것이다. 정권교체와 삼성비자금 사태에 기업들이 숨을 죽이고 있지만 이들의 경영승계 행보는 2008년에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재벌 3·4세들의 특권 ‘광속 승진’
30대 젊은 총수 등극 현대백화점그룹 정지선 회장 선임
한진그룹 3세 경영수업 막바지, 지난해 이어 올해도 진급
두산그룹 3세의 귀환, 4세들 전진배치로 경영승계 눈앞에

재계의 정기인사 이동이 지난해 말, 올 초까지 이어지며 희비가 엇갈리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승진에 실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승승장구하는 기업인도 있다. 이른바 ‘성과주의’에 오르내리는 인사라는 것. 하지만 그런 성과주의가 모든 기업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실적을 냉정하게 평가, 검증 받아서 승진을 하는 것이 아닌 ‘직급 맛보기’ 시간만 지나면 빠르게 진급하는 재벌 총수의 후계자도 있다. 이번 2008년 정기인사이동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재벌 3·4세들은 초고속 승진을 통해 주요기업 경영 일선으로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 30대 회장 탄생

지난해 정기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현대백화점이다. 범 현대家에서 첫번째 3세 경영체제가 공식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지난 1일 취임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2003년 1월 그룹 총괄부회장으로 승진한 지 5년만에 그룹 경영을 맡게 됐다.

정 회장은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3남인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 회장은 이 회사 기획실장(이사)과 기획관리 담당 부사장을 거쳐 2003년 1월부터 부회장직을 지켜왔다. 특히 지난해 정몽근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이후 사실상 현대백화점그룹을 진두지휘 했다. 때문에 금번 승진은 사실상 직함만 바뀌었을 다름이라는 것이 현대백화점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정지선 회장이 현대백화점에 입사한 것은 2001년. 불과 7년만에 회장까지 오른 셈이다. 정 회장은 올해 37세로 대기업 오너 일가 중에서도 최연소 회장에 속한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29세에 그룹 회장을 맡는 등 젊은 회장이 나온 적도 없지 않지만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한 목소리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백화점 그룹의 경영승계가 완료됐음을 공식적으로 천거한 것”이라며 “범 현대家의 승계에 가속도가 붙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진 3세 광속승진 질주

한진그룹의 3세 승진 행보도 숨 가쁘다. 한진그룹은 정기인사 이전부터 3세의 승진이 거론되며 재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사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3세 경영체제에 대한 해석을 누누이 거부한 바 있다. 조 회장은 지난해 9월 A380 국내 소개 행사에서 아들, 딸이 대한항공 내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자식들을 직원으로 부리고 있다. 일터에서 가족으로 특별한 관계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자식이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 회장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승진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 회장의 장녀 조현아 기내식 사업본부장과 장남인 조원태 자재부 총괄팀장도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각각 상무A와 상무B로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한진그룹의 직급체제는 상무A-상무B-상무보 순으로 높다.

이 과정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장남인 조원태 상무다. 조 회장의 형제간 다른 분야를 도맡아 해온 것은 故 조중훈 명예회장이 2세들에게 계열사를 맡긴 방식과 흡사하다. 조 명예회장은 자식들의 전공과 성격을 감안해 계열사를 맡겼다. 항공은 공대 출신인 조양호 회장에게, 중공업은 성격이 걸걸한 둘째 조남호 회장에게, 해운 쪽은 사교적인 셋째 故 조수호 회장에게, 증권은 금융 분야를 공부한 막내 조정호 회장에게 맡겼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여타 남매들과 달리 경영전략본부에 입사해 대한항공의 핵심인 자재부 총괄팀에서 근무해온 조원태 상무는 모기업인 대한항공을 이어갈 공산이 크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조 상무는 2004년 10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입사했다. 올해 32세인 그는 지난 2006년 1월 자재부 총괄팀장에 임명된 뒤 11개여월 만에 임원으로 승진한 데 이어 1년 만에 상무B 자리까지 차지했다. 조 상무는 지난 3월 한진그룹이 설립한 IT 회사인 유니컨버스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두산家 3·4세 경영 전면 배치

두산家의 경우 이런 움직임은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두산그룹은 지난 12월30일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부회장은 ㈜두산 부회장을 겸임하게 됐다. 박 명예회장의 차남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했다.

두산그룹의 정기인사 핵심은 한마디로 3·4세의 전진배치였다. 박 회장의 승진에 따라 두산 주요계열사를 총괄하는 3남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과 4남 박용현 두산걸설 회장, 5남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등 3세 형제들의 경영구도가 더욱 확고해졌다. ‘형제의 난’ 이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오너일가가 귀환하며 형제경형 부활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특히 박용만 회장의 그룹 내 역할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 회장은 올해 7월 미국 건설중장비업체인 ‘밥캣’ 인수합병(M&A)을 진두지휘하는 등 굵직굵직한 해외 기업 M&A에서 맹활약을 보인 바 있다. 박 회장은 지난 2005년 형제의 난 이후 사실상 그룹을 총괄해 왔다. 박용성 회장도 “그룹 경영에 관련된 것은 박용만 부회장에게 물어봐라”라고 했을 정도.

또한 재계의 주목받는 것은 바로 4세 전진배치를 통한 후계구도다. 3세들이 아직도 활발히 경영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번 인사를 통해 오너 4세들도 경영권 승계에 한발 더 다가선 것으로 풀이된다. 3세 경영진을 4세 경영진이 지원하는 구도가 된 것이다. 특히 장손인 박정원 부회장이 앞으로 지주회사 역할을 할 ㈜두산의 부회장을 겸임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장자상속 전통 후계구도에 비춰 주목되는 대목이다.

동양그룹 3세 등장

한편 동양그룹은 최근 현재현 회장의 외아들인 현승담 차장이 지난해 지주사격인 동양메이저 차장으로 입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동양메이저에 입사한 것이다. 현승담 차장의 나이는 27세로 2005년 미국 스텐포드 대학을 졸업했다.

이로써 장녀, 장남, 차녀 등 1남3녀 중 세 자녀가 동양그룹 계열사에서 근무하게 된 셈이다. 장녀 현정담 씨는 동양매직 차장으로, 차녀 현경담 씨는 동양온라인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승담 차장은 올해 6월 그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현승담 차장의 경영 수업이 본격 시작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미 그는 동양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인 동양레저 지분 20%를 보유하고 있고, 동양레저가 금융지주회사 동양종금증권과 제조지주회사 동양메이저의 최대주주라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초고속 승진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승담 차장이 동양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동양메이저 주식을 11월부터 3차례 걸쳐 매입하는 등 최근 부쩍 보유지분을 늘려가는 것으로 볼 때 경영권 승계기반을 갖추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이해되고 있다.

재계에서 2008년은 본격적인 3·4세 경영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들이 경영승계까지 가는 당위성을 위해서라도 공격적인 경영으로 성과를 인정 받으리라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재벌 3·4세의 경영의 결과가 좋든 나쁘든 국내 재벌의 풍토변화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맨손으로 기업을 쌓아올린 1·2세대와는 달리 선진화 경영수업을 거치고 안정적인 승계를 받은 3·4세대의 경영능력과 마인드는 국내 재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다가 오리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재벌 3·4세의 능력 검증이 미약한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경영수업이 재벌家 사이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재벌 자녀라고 모두 경영에 뛰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외환위기 때 쓰러져간 재벌들이 충분히 증명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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