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흉(避凶)하고 길운(吉運)을 부르는 길은 개운(開運)법에 있어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운세코칭]…<팔자·천명(天命)은 우주유전자·우주바코드❶>에서 계속…유동체인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치이고 진실이라고 서경(書經)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인간이 실천하는 공덕의 수행과 변수가 어떻게 상수(象數)를 능가하는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옛 성인들의 가르침은 진리이기에 거의 변하지 않는다. 까마득히 먼 옛날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분들의 말씀을 그래서 풀어지지 않는 경(經)이라고 부른다.

둘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중국 민중의 종교윤리 사상을 말한 민중도교의 성전인데 도교의 시조인 노자(老子)·태상노군(太上老君)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다. 이 경전의 한 부분에는 화복무문·유인자초(禍福無門·惟人自招)라고 적고 있다.

예컨대 [불운이나 행운이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오지 않는 것이고 인간들이 그러한 것들을 불러들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말로 불운이나 행운은 인간이 과거에 한 행동들이 가져온 보복이나 보상이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런 내용을 믿지 않고 우리들의 의견을 따라 비행과 악행을 저지른다면 자신의 죄만 증대시킬 뿐이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비록 우리가 아주 작은 이익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 운명에 의하여 갖게 된 것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만일 사람이 덕을 닦고 수행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가 얻은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부(富)도 지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수명(壽命)도 또한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수명을 지속할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을 가져본들 뭐할 것이며 또 특별한 그 어떤 것을 가진다고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점이 바로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에 분명히 설해져 있음이니 말이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는 자신의 가족·친구·명예·위신·재산 그 어떠한 것 하나도 내생(來生)으로 가져갈 수가 없음이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숨이 멎어 임종(臨終)할 때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일생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죽음의식인 임종할 때에 다음 중 어떤 하나가 업(業)의 힘에 의해 6가지의 문(門)들 중에서 그 어떤 하나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첫째는 상황에 따라서 임종할 사람이 바로 다음 생에서 직면하게 될 재생연결을 생산할 업(kamma)이다. 둘째는 이전에 업을 지을 때에 인식했던 형상이나 그 업을 지을 때에 사용한 기구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다.

셋째는 바로 다음 내생에서 얻거나 경험하게 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사람이 숨을 거두어 임종할 때에 업(kamma)과 업의 표상(kamma-nimitta)과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이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화엄경의 보현보살행원품은 나눔과 베풂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현보살의 10대 원(願)을 닦아야 함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의 업(業)을 빼고는 아무 것도 내생으로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 중생들이 주의해야할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자신이 지은 업(業)이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옴을 알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부지런히 선행을 닦고 덕을 쌓아 나쁜 업들을 내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을 할 것이니 말이다.

인생은 찰나처럼 매우 짧고도 짧다. 우리가 금생에 더 많은 선행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크나큰 공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옛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이를 믿으며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한한 공덕과 이익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믿고 따르고 말고는 모두 자유다. 행운과 불운이 모두 자신의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운명이 통제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밝고 빛나게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절실한 것이다. 흔히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는 불가사의한 업(業)에 대한 말이다.

어쩌면 업(業)의 탓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으로도 들리는 말이다. 이렇게 업(業)타령을 함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 업(業)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업(業)을 뛰어 넘고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종하는 조종사가 됨이 어떨까? 사람이 타고난 천명(天命)도 있고 살아가는 진행과정인 운명(運命)도 분명히 있다.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운명을 다양한 측면에서 개운(開運)하는 방법을 찾아 자신의 운명과 운세를 스스로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도 있음이니 이게 바로 운명철학적인 과제라고 할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주(四柱)·천명(天命)]는 불변(不變)의 상수(常數)이나, 후천적으로 살아가는 [삶·운명(運命)·운세(運勢)]는 가변(可變)의 변수(變數)에 해당하는 사항이기에 [사주천도(四柱遷度)·사주개운(四柱開運)·흉살봉인(凶殺封印)] 등의 방편을 통해 충분히 개선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글/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인생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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