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 ‘오적’ 이야기 2



편집장과 시인은 발행인 앞에서 서로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려고 좀 서투르게 만기도 하는 등 이 작품이 빛을 보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오적>>을 읽어 내려가던 부완혁 발행인은 웃음을 억제치 못하면서 “김선생이 알아서 처리 하시죠”라며 미뤄 결국 70년대의 문제작은 바로 5.16특집호에 군부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여러 글들과 함께 실리게 되었고, 그 인기만큼 빨리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한 신문은 사설에서 “담시는 일종의 광가(狂歌),광언(狂言)에 속하는 것”으로, “맹랑한 헛소리”라고 깔아뭉갰다.

“그 담시가 우리 국가와 국민 전체를 도매금으로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북괴도당에 부종하려는 결과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고 목청을 돋군 이 사설은 계속하여 “전문되는 바에 의하면 담시 작자는 북괴 도당의 대남정책인 ‘전면 부정’의 결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붓재주를 놀리는 피해망상에 젖은 노이로제 환자였다고 한다”는,

마치 구소련의 정신병동 수감정책과 같은 논리를 폈다. “그 작자는 무당이 내렸거나 귀신자귀에 홀린 정신 소유자가 아니면, 그 작품은 소위 무당들의 ‘대감놀이’ 넋두리나 미숙한 판소리 흉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문학작품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극언을 해댔다. 이쯤 해도 좋으련만

이 글은 “병 든 작자의 광언같은 것을 인용 게재”한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대해서도 “편집 양식을 일탈한 일”이라고 펄펄 뛰었다. 참고로 밝히노라면 <<민주전선>>은 군부독재 시절에 차마 군부의 부패상은 치고 나설 수가 없어 <<오적>> 중 ‘장성‘에 해당하는 부분만은 삭제하고 나머지만 실었다.

언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열심히 이뤄지고 있지만여전히 부족하다. 필화사건 때마다의 사설집만 뽑아 그 필자를 밝혀 내노라면 함부로 붓끝을 못 놀릴 것이다.

어쨌건 ‘광언’ <<오적>>의 ‘노이로제 환자‘ 시인을 가둔 당국은 세상이 이 신문 사설처럼 취급해주기를 바랐겠지만 전혀 반대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남정현의 <분지>로 필화의 경험이 풍부해진 문단에서는 유파와 세대를 초월하여 석방의 목소리가 커졌고, 시는 삽시간에 전국 단위에서 지구촌으로 번져나가 김지하는 한국에서 가장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문인이 되어버렸다.

조태일 시인이 주관하던 시전문지<<시인>>을 통해 1969년 갓 시인이 된 김지하를 사적으로 알고있었던 사람은 서울대 출신을 비롯한 극소수였으나 <<오적>>사건은 분단 이후 최대의 저헝시인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더구나 막상 공판이 열리고 보니 그는 ‘노이로제 환자’도 ‘무당’도 아닌 탁월한 이론가에다 말솜씨까지 갖춰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변호인이 질문만 해주면 되었다. 그렇다고 변호인이 둘러리였다는 뜻은 아닌 것이 당대의 민권 변호인이었던 태륜기.홍영기.한승헌을 비롯한 여러 변호사가 법정을 뜨겁게 달궜고, 방청석에는 함석헌.장준하.안병욱 제씨를 비롯한 문인,민주인사,운동권 출신들이 총집결했다.

대법정에서 열렸던 <<오적>> 공판은 그의 익살과 달변으로 마치 만담장이기라도 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나중에 <<다리>>지 필화 때 무죄를 언도하여 화제를 일으켰던 목요상 판사(현 한나라당 의원)가 맡았던 이 재판은 나중에 네 구속자와 분리하여 김지하만 별도로 심리하게 되었는데, 3개월 쯤 지나자 폐결핵 악화로 김시인은 병보석 되었다.

다른 네 구속자들도 시차를 두고 하나씩 풀려나 사건이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그 해9월 26일 유서 깊던<<사상계>>는 문공부로부터 등록 말소처분을 받았고, 김지하 시인은 간헐적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이 재판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김시인은 5.16이후 한국사회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보면서 그 최고수를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이란 다섯 직종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 부패의 직종을 알기쉬운 한글로 표기한 게 아니라 웬만큼 유식한 인사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도록 옥편을 갖다놓고 같은 음을 찾아 이두식으로 꿰어 맞췄는데, 되도록 개견변(犭)이 들어있는 한자를 선호했다. 다섯 도둑들은 사람이 아니라 개같은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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