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게 온정의 손길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남한을 찾은 탈북자들. 우리는 이들을 새터민이라고 부른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북한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먹고사는’ 문제다. 지난 11월20일 서울 화곡동 KBS 88체육관에서 열린 ‘새터민 채용자한마당’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터민들이 한꺼번에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자리가 월급 1백만원 수준의 단순생산직에 머물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새터민들이 한 목소리로 바라는 것은 ‘안정적인’ 직장이다. 단순히 생활을 위한 직업이 아닌 꿈과 목표를 가지고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이다. <시사신문>은 지난 11월28일, 경기도 분당에서 새터민 이행서(35)씨를 만나 눈 앞에 닥친 취업문제와 한국생활에 대해 들어봤다.

탈북자 1만명 시대 전체 55%는 무직
나이와 경력 부족으로 취업 힘들어
탈북 초기 연령대에 맞는 교육 필요

이행서씨는 탈북자들이 본격적으로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2001년, 중국과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에 사업차 들렀다가 라디오를 통해 한국 방송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탈북자 간첩 보도로 전근 종용

이씨는 “북한에서 생활할 당시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남한에 대해 알게 됐다. 특히 대학생들의 데모활동이나 그날 그날 벌어진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방송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북한에서는 사회적 이미지를 훼손하는 보도는 일절 하지 못한다. 언론의 자유는 곧 인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뜻이라는 생각에 남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씨는 감히 남한으로의 탈북을 엄두 내지 않았다. 막연히 남한을 동경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2001년, 사업차 들른 중국에서 다시 한번 라디오를 통해 남한사회를 접하게 되고 ‘지금이 내 인생의 전환점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 몽골을 통해 2001년 6월 남한에 입성했다.
북한에서 공대 금속학과를 전공한 이씨는 남한에서의 첫 생활을 포항에서 시작했다. 포항제철을 취업지로 고려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냉정했다. 이씨는 “한국은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에 입사지원자의 능력과 경력 등을 우선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온 낯선 사람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풀 리가 없다. ‘정규모집에 지원하라’는 얘기만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취업 도전에서 고배를 마신 이씨는 여러 가지 일을 통해 돈을 모아 2002년 큰 결심을 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편입을 결심한 것이다. 2003년 3학년으로 편입한 이씨는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인 ‘S’기업 울산공장에서 인턴생활을 하게 됐고 2004년, ‘S’기업으로부터 입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하지만 이씨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사 한달만에 모 일간지에서 탈북자 가운에 간첩이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고 보도 직후 ‘S’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이씨를 불러 지방계열사로 전근을 추천했다. 그것도 대졸자인 이씨에게 고졸의 대우를 조건으로 전근을 종용한 것이다.

불합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은 이씨는 2005년 졸업과 함께 중국행을 택했다. 글로벌시대에 견문을 넓히고 경영 마인드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일은 순탄치 않았다. 2년여 동안 동료들과 함께 피혁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2년만인 2007년 6월 이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적인 차이, 취업걸림돌

▲ 지난 11월20일 열린 새터민채용자한마당.
한국으로 돌아온 이씨는 한국사회에서 취업의 어려움을 다시한번 몸으로 실감했다. 하지만 이씨는 “탈북자들의 취업이 어려운 이유를 사회적 편견과 냉대라고 보지 않는다. 북한과 남한의 사회적인 차이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탈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30대와 40대다. 남한에서의 취업은 30, 40대라는 나이부터 걸림돌이 된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경력을 중시하는데 탈북자들이 경력이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나이와 경력 이 두가지에서 이미 취업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냉정한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기업에 이득이 되는 사람을 뽑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탈북자들은 이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탈북 초반에 이루어지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령대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취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이씨는 일주일에 세 번 서울 삼성동에서 이뤄지는 새터민 대상 ‘취업교육프로그램’에 참여중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력서 작성 요령, 면접 방법, 적성검사를 통해 새터민들의 취업활동을 보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씨는 “취업을 위해 눈높이를 조금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처음 한국생활을 하면서 연세대라는 큰 울타리가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력서도 대기업 위주로 넣었다. 하지만 면접까지 이어진 경우조차 한 번도 없었다. 이씨는 그때 한국사회에서의 취업은 한단계 눈 높이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큰 꿈을 품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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