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형! 낮은 곳을 보십시오 1

1999년 만추. 낙엽이 바람결에 힘없이 뒹굴고 있을 때 저는 이 민통선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그 잿빛만큼 이 민통선 마을도 이승의 어느 끝 마을처럼 내 눈엔 폐허의 마을로 비쳐져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아름답던 단풍들도 제 할 일을 다 마친 냥 밀려오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철책선 너머 강 건너 북한 땅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P형!

저는 그때 어쩌면 삶의 지표를 잃고 있던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길목에 서 있던 어떤 사람보다도 제가 더 좌절하고 맥 빠진 모습으로 이 땅의 절벽에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설명을 하려면 깁니다만, 저는 저 스스로의 절제되지 못한 과욕의 원죄에 의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왜? 제가 그때 그처럼 삶과 열심히 싸웠는데도 좌절해야만 했었는지 당당하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삶을 한 모퉁이씩 소각하듯 성실히 불태웠는데 그것이 한순간 삶을 포기해야하리만큼 맥빠져 버리는 사실 앞에 저는 꼬꾸라져야 했습니다. 197,80년대는 제게 황금기와 같은 젊음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조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아니,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온몸을 던진 시기였습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 몸 어느 한구석에는 저항의 불씨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의 집착으로 사회구조가 모순으로 심화되는, 그 구조에 도전하는 것은 지성의 당연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저항의 불씨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90년대까지 치열하게 군사독재와 맞짱을 떴습니다. 특히 80년대는 삼청교육대가 전두환 군사 정권이 조작한 양민인권 학살임을 세상에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 역시 그 피해자의 한사람이었으니까요.

저는 삼청교육대를 최초로 세상에 폭로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군사정권의 감시를 피하며 책을 집필하다가 두 번이나 <양곡상사건>으로 조작되어 구속까지 당해가며 한 가지 사건을 폭로하는데 사력을 다했습니다.

결국은 김진홍교수 (한국외대. 언론학)가 운영하던 <전예원>출판사에서 그 책은 빛을 보게 되었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책을 펴내면서 영광과 고통의 긴 터널 속에서 오랫동안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진실을 위하여 할 말을 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책이 출판됨과 동시에 수배라는 어두운 그늘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으니까요. 또 5공 청문회에 나간 덕분에 더, 큰 시련을 겪기도 했지요.

덕분에 당시 전국 각 대학교에 불려 다니며 군사정권을 질타하는 강연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정보기관엔 주의 인물로 찍혔지만 저항 시인으로 작가로 사는 당연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강연이 끝나면 대학생들은 나를 포위하듯 나의 은둔처까지 경호했으며 그렇게 강연현장을 빠져나온 나는 다음 강연장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땐 삶의 고난이었지만 민주화의 역정이라는 삶에 대한 정의로운 여정이 있어 생을 자랑스럽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산 덕분으로 당시의 야당들이 나를 국회의원 후보로 찍었으나 저는 그 기회를 버렸습니다. <문인이 무슨 정치를 하냐고?> 저는 그렇게 거절했었지요.

대신 아내를 총선에 내보냈습니다. 저는 문인의 역할인 글로서 행동으로서 정권교체를 외쳤습니다. 당시 나와 함께 공동집필했던 <김대중살리기>는 영남 문인들이 쓴 김대중씨 관련 에세이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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