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구해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영화 ‘화려한 휴가’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또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내 한복판에서 전두환이 저질렀던 그 끔찍하고 처절했던 민족학살극은 2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살아있는 현장’으로서 우리들을 전율케 하고 있다. <시사신문>은 윤재걸,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무삭제 원본 ‘도큐멘터리-光州, 그 비극의 10일간(3백50매)’을 통해 1980년 5월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로 야기된 광주민주항쟁의 발단과 그 비극적 최후를 지상에다 온전히 펼쳐보려 한다. 그날 숨져간 민주영령들께 다시 한 번 명복을 빌면서, 독자 제현의 일독을 바라마지 않는다.

▲ 사망자는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거나 신원이 파악된 시체가 1백69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40여구, 공사 중인 충장로 지하상가에서 집단으로 발견된 23구의 시체 등이었다.

한편 5월24일 도청 내 수습대책위는 오후 1시경 도청상황실에서 위원장인 김창길의 사회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열었는데,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요구로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인 폭도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라.
등의 4개 항목을 계엄당국에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밤 9시경 도청상황실에선 또 다시 학생수습대책위가 열려 ‘무기반납’에 대한 토의를 벌였다. 회의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됐고, 25일 새벽 1시경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들 중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 “이런 엄청난 규모의 사태를 학생들만 책임지고 수습한다는 건 힘들다”고 판단하고 황금선, 박남선, 김화성 등 일반인도 포함하여 학생수습대책위의 기구를 확대 개편하였다. 위원들은 다음과 같다.
▲ 위원장-김창길
▲ 부위원장 겸 총무 및 대변인-황금선
▲ 부위원장 겸 대변인 및 장례담당-김종배
▲ 상황실장-박남선
▲ 경비담당-김화성
▲ 기획실장-김종필
▲ 무기담당-강경섭
▲ 홍보부장-허규정

의문의 ‘독침사건’ 발생

사태가 발생한지 8일째, 광주시내를 시위대들이 장악한지 나흘째에 접어든 5월25일 아침, 도청 안에선 느닷없는 ‘독침사건’이 발생,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오전 8시경 장계범(21세·황금동에서 술집경영)이란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로 쓰러지듯 들어오면서 어깨를 움켜쥐고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경비 중이던 시위대의 한 명인 신만식(방위병)이 어깨를 살펴보려고 하자 장계범은 “너는 필요 없어, 정형한테 부탁 하네” 하면서 옆에 서 있던 정한규(23·운전사)를 지목했다. 정한규는 장의 웃옷을 벗겨 상처부위를 몇 번 빨아낸 후 부축하여 대기중이던 차로 전남대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이 사건으로 도청 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말았다. ‘독침사건’에 접한 상당수 시민군은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한 모양”이라며 “불안해서 더 이상 못 있겠다”고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접한 학생들은 즉각 “시위대 교란을 위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사건은 시민군의 전열을 흐뜨러트리기 위한 고도의 음모임이 밝혀졌다.
부위원장인 김종배는 도청 내 시민군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순찰대원 윤석두, 이재호, 이재춘 등 6명에게 지시하여 이 사건을 확인토록 하였다. 독침에 찔렸다던 장계범은 전남대병원에서 도망친지 이미 오래였다. 장과 정은 첩자였다고 수습대책위는 공식 발표하였다.

광주시는 며칠째의 평온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돼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상당수 문을 열었고, 시 외곽지역으로부터 경운기에 실려 야채가 시내로 반입되고 있었으며, 고아원 및 사회복지단체 등에 대한 식량공급은 시청직원들의 지원에 의해 별다른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은행이나 신용금고 등 금융기관에서도 사고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줄을 이어 혈액공급이 원활치 못하던 병원은, 이젠 헌혈차들에 의해 피가 남아 돌아가고 있었다.
도청 내 시민군 지도부의 3~4백명에 달하는 식사는 처음엔 시민들이 밥을 지어 날랐으나 항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각 동 단위로 식량을 거두어 보내기도 했고, 모금된 돈으로 부식을 사오기도 했다. 24일부터는 시청당국의 협조로 비축미를 공급받고 있었다.

이날부터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대학생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밤 편성한 잠정적 지도부의 역할분담에 따라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 앞장서게 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보성기업에 모여 사태의 전망과 추이를 숙의했던 이 고장 운동권 청년들은 평소 자신들과 민주화운동에 함께 앞장서왔던 광주권 재야인사들에게 개별적으로 ‘YMCA에서 오전 10시에 회합을 갖기’로 연락을 취했다.

YMCA 2층 총무실에서는 홍남순씨(변호사), 이기홍씨(변호사), 이성학씨(장로), 송기숙(전남대), 명노근 교수(전남대), 장두석씨(신협), 윤영규씨(장로), 조아라 여사(YWCA회장), 이애신 여사(YWCA 총무) 등 재야민주인사와 청년대표인 정상용, 윤상원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태수습방안에 대한 진지한 토의가 있었다.

재야인사들 중 이성학 장로와 윤영규 장로 등 몇몇 인사는 청년들의 강경입장을 지지했으나, 명노근 교수 등 대부분은 청년들의 입장을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은 궐기대회에 함께 참석 “여러 어른들께서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회의가 끝난 후 오후2시 민주인사들은 남동 성당에서 김성룡 신부, 조비오 신부, 오병문 교수 등이 함께 모여 재야인사들의 도청수습대책위 참여문제를 논의, 합류키로 결론을 얻고 오후5시 도청에 들어갔다. 이들은 도청 부지사실에서 회의를 속개, 여기서 김성룡 신부가 제의한 4가지 사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김신부를 대변인으로 해서 25명의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들이 이에 서명했다.

23일과 24일에 이어 25일에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각 동별로 플래카드를 들고 도청 앞 광장으로 집결, 그 숫자가 15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대회에선 ‘희생자가족, 전국종교인, 전국민주학생에게 드리는 글’이 채택되었고 ‘한국정치보복사’에 대해 토론과 성토가 있었다. 특히 시민군 대표에 의해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가 낭독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어서 ‘광주시민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나?」 성명 전문

먼저 이 고자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도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18일 아침, 각 학교에 공수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아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과 청년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차에 깔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짤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 공수병들을 보내 지역감정을 충동질했으며, 도구나 공수대를 3일씩이나 굶기고, 더더구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도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공식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들을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르게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적으로 밀어주시고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 5. 25. 시민군 일동

이날 궐기대회에선 지금까지 파악된 시민피해상황이 보고 됐는데, 도청본부 집계에 의하면 현재 시내 각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는 5백20명, 경상자가 2천1백70명, 사망자는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거나 상무관 도청 뜰에 있는 신원이 파악된 시체가 1백69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40여구, 공사 중인 충장로 지하상가에서 집단으로 발견된 23구의 시체 등이었다. 이밖에 도청본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시체가 계엄군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가 버렸으며, 행방불명자는 2천여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고 밝혔다.

운동권이 참여한 ‘확대수습위’ 구성

이날 궐기대회가 끝난 직후 운동권의 지시를 받는 대학생들이 속속 YMCA에로 모여들었다. 오후 7시경에는 그 수가 1백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10명을 한 팀으로 조를 짠 후, 윤상원 등 운동권 주체의 인솔하에 도청에 들어가 수습위와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항파’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김창길 황금선 등이 조직을 이탈, ‘투쟁파’가 학생수습위를 완전 장악하게 되는 변화를 맞았다. 밤 9시 무렵이었다. 광주 운동권의 중심인물들이 새로이 참여한 수습위원의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위원장-김종배(25·조선대 3년)
▲내무담당 부위원장-허규정(26·조선대 2년)
▲외무담당 부위원장-정상용(31·회사원 전남대 법대 졸)
▲대변인-윤상원(29·전남대 정외과 졸,<들불>야학운영, 5·29 계엄군 진입시 피살됨)
▲상황실장-박남선(26·운전기사)
▲기획실장-김영철(32·신협이사)
▲기획위원-이양현(30·노동운동·전남대 사학과 졸)
▲기획위원-윤강옥(28·전남대 4년·민청학련 관련자)
▲홍보부장-박효선(중학교 교사·국문과 졸, <광대>창단멤버)
▲민원실장-정해직(29·국민교 교사, 흥사단아카데미 활동)
▲조사부장-김준봉(21·회사원)
▲보급부장-구성주(25·시민)

5월26일, 날이 채 밝기도 전인 새벽 5시 무렵 농성동을 경계중이던 한 시위대로부터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도청으로 흘러들었다. 도청 안은 벌집을 쑤신 듯 벌컥 뒤집혔다. 전시위대에 초비상령이 하달되었다. 이날의 긴박한 분위기를 김성룡 신부는 광주 정평위 간행 <광주의거자료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죽음의 행진! 새벽 5시30분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돌연 초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전차가 진입해 온다. 순간 수라장으로 화했다. 총을 가진 시민군, 학생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달렸으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전원 자폭하자, 상황실에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차가 출동하였으며,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리면서 주변의 동태를 물었다. 의자에서 자고 있던 부지사가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속은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괴롭고 불안하다. 철야로 화약고를 지키고 어떻게 하든지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설득을 계속해 왔는데….
“주여, 구해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순간, 자칫 잘못하면 광주시민은 파멸한다. 자지 못하고 끊임없는 공포와 피로에 심신이 소모된 젊은 사람들이 TNT에 불을 붙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막아야 한다. 흥분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 위기를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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