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반대말은 '진보'인가?

임헌조 칼럼니스트
임헌조 칼럼니스트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딱지'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한때, '보수'는 우리나라에서 주류였을 때가 있었다. 60% 안팎의 국민들이 주저없이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와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보수는 시나브로 비주류로 전락했고, 소위 '진보'가 주류가 되었다. '보수'의 반대는 '진보'가 된지 오래다. 과연 이 정의는 맞는가?

다른 한편, 2000년대 초, 일부에서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여 부르자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보수가 갖는 부정적 의미를 고려한 대처법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오른쪽에 왕당파가 왼쪽에 공화정파가 앉아있던 유래에서 나온 좌우 개념을 차용하자는 것이다. '좌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국민을 반으로 나누어 진영화하는 개념으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비주류가 된 지금에! 

결국 절충하여, '보수우파' '진보좌파'라는 말을 어정쩡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도 말이 되는가? 정명(正名)은 정체성 identity을 세우는 일일 뿐만 아니라 비전을 만드는 기초이다. 우리의 '이름', 내가 부르고 모두가 불러줌으로써 당당해지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아울러,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 또한 정확히 정의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이 글을 쓴다. 

1. 우파의 반대는 좌파라고 합니다. 좌우는 정책의 문제로서 보수도 시대정신과 상황에 따라 좌, 우의 정책을 선택할 수 있고 추진할 수 있습니다.(대표적으로, 박정희 정권 때 추진한 '의료보험정책' '연금보험 정책' 등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인공지능 4차산업혁명 등에 따라 좌우의 구분이 정책에 있어서는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2. 유발 하라리(Sapiens의 저자)는 다가올 과학혁명의 변화 속에 전통적인 좌우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짧으면 10, 길면 20여 년뒤, 특이점 singularity 이 오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HomoSapiens→HomoDeus)도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3. 보수 conservative 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진보(進步)’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정의입니다. 이것은 수십 년간, 한국 사회가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표현하며 굳어진 것입니다. 보수(保守)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해온 전통과 문화를 보전하고 가꾸어 지킴여기서 보전(保全)’은 연속적인 유대와 지속가능성을 의미하고, ‘가꾸다는 표현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보전하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와 가치를 내부의 적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사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그렇다면 이러한 뜻의 보수의 반대말은 무엇인가요? 소위 진보의 영어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advance입니다. progress가 있습니다. 이 둘은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앞의 단어는 카운터블 countable 셀 수 있는 단어로 사용될 수 있고, 뒤의 단어는 과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언카운터블 uncountable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소위 한국 보수, 진보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과학적 진보, 기술적 진보, 과학적 발견, 산업의 발전, 사회적 발전, 시민성의 개발, 사회 시스템의 선진화, 교육적 성과 등 모두 사용 가능한 것으로, 소위 한국 진보들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5. 헌법적 가치 아래 한국 사회를 발전시켜 온 세력은 모두 위의 두 단어를 사용할 수 있지요. 좌파운동권 실무자가 위의 두 단어를 소위 진보진영의 고유 단어라고 말해서 알아듣게 설명했더니 혼란스러워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6. 미국에서 공화당의 이념은 보수 conservative입니다. 반면 민주당의 이념은 진보가 아니라, 리버럴 liberal입니다. 리버럴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전통적 가치보다는 히피, 퀴어, 차별반대 등 전통적 가치와는 다른 또는 대립하는 과거보다 자유로운이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미국 민주당에는 공산주의자부터 자유민주주의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미국 양당은 모두 자신들이 advance하고 또 progress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지요.(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고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영어로 liberal democracy 라고 합니다. 리버럴이 여러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한편, 한국 좌파들이 리버럴은 좋아하지만, 리버럴 데모크러시-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는데 주저하는 것도 요상하지요.)

7.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보수의 반대는 파괴입니다. 진보가 아닙니다. 영어 단어 중에 radical이 있습니다. ‘급진적이란 뜻인데, 과정을 무시하거나 뛰어넘어 무리한 변화를 추구할 때 이 표현을 씁니다. 과정을 중시하는 advanceprogress와는 맞지 않는 단어입니다. 소위 한국의 진보 또는 좌파는 급진적인 측면에서 레디컬이 맞습니다. 이것은 과정을 무시하기 때문에 파괴를 불러옵니다. 그런 면에서 보수의 반대를 레디컬-급진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과거 보수가 주류였을때, 보수의 반대는 급진세력이었습니다.)

8. 사회 분위기와 잘못된 의미 때문에, 우리는 보수 앞에 개혁합리를 붙여 개혁적 보수또는 합리적 보수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소위 보수의 어두운 이미지를 의식한 표현입니다.

9. 말과 언어는 사고방식을 규정하고 나아가 사회적 규범과 문화를 정의합니다. 우리는 이 언어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보수는 좋은 의미로 쓰이며 한국 사회의 주류였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보수라는 표현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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