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시인의 "해창에서"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항도 아닌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
바닷속으로 비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
영당(靈堂)자리에 비

수십킬로 뻘을 질러 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
타는 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온통 환하게 몸 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갈 뿐이다.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고향.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내 어릴 때 도화지에 그린 크레파스 같은 삶이 소롯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내 어릴 때 보았던 풍경과 내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조약돌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내 어릴 때 무지개처럼 빛나던 희망이 새록새록 숨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늘 어스럼 찬바람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고,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고 있었고, "홀몸 조개미 아짐"과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흉어철이 되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고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해창은 그때 그 모습이 아닙니다. 시인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을 훌쩍 뛰어넘고, 얼굴에 잔주름이 늘어가듯이, 해창갯벌도 어느새 시인처럼 나이가 들었는지, 그때 그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없습니다. 항구도 아니고 폐항도 아닌 해창에는 그때 그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시인을 추억 속으로 불러 세웁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한없이 슬퍼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바다 속으로도 비가 내리고, 영당이 있었던 그 자리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두 눈을 흐리는 눈물 같은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추억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고 있습니다.

방조제가 둘러쳐진 갯벌을 바라보며 "수십 킬로 뻘을 질러간다는 저 방조제"위에 서서 "끝이 어딘지를" 묻지 않고 그냥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느새 "타는 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바라보면서 어렸을 때의 그 아름다웠던 시간을 찾아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근데 자꾸만 비가 내립니다. 이 비는 실제로 내리는 비일 수도 있고, 시인의 마음속에 내리는 비,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쳐놓은 바닷가 철책을 지나 수십 킬로 갯벌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의 속살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시인은 수십 킬로 뻘을 가로 지르고 있는 방조제에 대한 아픔을 꺼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갯벌이 둘러쳐진 해창에 괴물 같은 방조제가 생기면서 대자연의 질서가 여지없이 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괴물 같은 방조제 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마침내 그 방조제를 뛰어넘고, 사람과 대자연을 갈라놓은 철책마저 스스럼없이 뛰어넘어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대자연과 사람이 모두 하나 되어 살았던 그때 그 아름다운 시절로 끝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