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한국 협객 조일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후계자로 알려진 조일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로 거듭났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던 구치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오히려 새 삶을 살게 됐다”고 간증한 이후 최근에는 ‘헌혈 홍보 전도사’로 활동하고 ‘전도상’까지 수상했다. 구치소 수감 당시 조일환은 고혈압과 당뇨, 협심증으로 1평 독방에서 죽음을 눈앞에 뒀던 터라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조일환은 현역 주먹계를 떠나 ‘주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주먹계는 아직도 그를 ‘현존하는 유일한 한국 협객’으로 부르고 있다.

▲ 조일환과 그의 아내.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아로 혼자 떠돌이 생활해
“주먹 후계자 있는데 단지 후계자 없어 아쉽다”
‘워커힐 호텔 사건’과 ‘단지 사건’, ‘속리산 카지노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현장에는 조일환이 있었다. 그는 워커힐호텔을 조직폭력배 1천여 명으로 포위하고 경찰과 협상을 벌일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내였다.

특히 일본대사관 앞에서 민족적 울분을 토하며 33명의 주먹계 식솔들과 함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자른 ‘단지 사건’은 처참하리만큼 국민들 뇌리와 가슴에 남아있다.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는 후배들은 ‘협객’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조일환은 “스승이었던 김두한을 보면서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었다”며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이 나를 더욱 강인하게 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17살에 얻은 이름 ‘천안곰’
조일환은 그의 나이 17세에 천안을 장악하면서 ‘천안곰’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천안은 교통의 중심지로 5백여 명 가량의 소매치기범들의 총집결지나 다름없었다. 유사 범법자들까지 포함한다면 족히 1천여 명은 넘었을 것이다.

이들을 물리친 후 조일환은 천안 일대의 대장이 됐다. 1950년대 당시 평균 몸무게가 40kg일 때 조일환은 1백30kg의 거구였다. 그야말로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이듬해에는 충청도 일대까지 그 세를 확장시켰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아로 혼자 떠돌이 생활을 하다 이후 6.25전쟁까지 거치고 나니 삶에 대한 집념이 강했던 것 같다. 고아가 지천에 깔려 있었는데 그들은 밤마다 배고프다, 엄마가 보고 싶다 울부짖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고 일어나면 밤새 잠 못 이룬 아이들 절반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고아는 좀체 줄지 않았고, 다음날이면 금세 다른 고아들로 그 숫자가 채워졌다. 마치 죽음의 골짜기 같았다.”

그가 어린시절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행상을 다녀온 조일환. 그들은 젓갈이 담긴 독을 정자나무 아래서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일본군 두 명이 젓갈냄새에 코를 감싸 쥐며 독을 발로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울면서 젓갈을 주어 담던 어머니를 보자 조일환은 참지 못하고 일본군이 타고 온 말의 항문에 대나무를 힘껏 쑤셔 넣었다. 놀란 말은 난동을 피웠고 이에 화가 난 일본군들은 조일환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6살 때였다.

징병나간 아버지와 젓갈장사하며 생계를 잇던 어머니. 결국 그의 어머니는 추운 겨울 조일환을 버리고 말았다. 이후부터 비렁뱅이 같은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그는 거지들 패거리에 끼여 목숨을 부지했으며, 왕초는 또래들보다 훨씬 몸집이 좋았던 조일환에게 ‘곰’이라 불렀다.


33인의 절단 “일본 사죄하라”
조일환을 두고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단지(斷指)시위 사건’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일본인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하자 일본 측의 사죄를 이끌어내기 위해 1백명의 특공대 선발했다. 90명은 손가락을 잘라 애국심을 보여주고, 나머지 10명은 할복을 해서 한국인의 혼을 보여주자는 뜻에서다.

조일환에 따르면 문세광은 일본 여권 소지자였으며 일본의 한 경찰서에서 도난당한 권총을 국내에 반입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모른 척 뒷짐만 지고 있었다. 암살 사건의 단초를 일본이 제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연일 수수방관하는 입장을 보이자 조일환과 그의 식솔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당시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3천여 명이 일본을 테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폭력보다는 무언의 전술이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을 달리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결심과 충성심을 보이는 방법으로 할복을 택하는 것을 보고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1974년 9월9일, 이날 조일환을 비롯해 33명의 왼손 손가락이 잘려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한 여대생은 수치스러움도 잊은 채 자신의 블라우스를 찢어 잘린 손가락을 동여매주기까지 했다. 그 뿐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을 통해 조일환을 ‘우국지사’로 불렀다.

“지난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앞두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항의하고자 아내와 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손가락을 잘랐다.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불합리한 단지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주먹 후계자는 있는데 단지 후계자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일환과 일본의 인연은 기묘했다. 그가 해외에 나간 경험은 1990년도에 단 한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우익단체의 격렬한 노태우 전 대통령 방일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청와대와 안기부의 청원으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청년사파의 에도 회장이 조일환과만 협상을 하겠다고 전했다. 조일환과의 담판에 따라 일본 우익단체의 시위가 중지되느냐 마느냐 하던 차였으니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그는 에도 회장과의 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과의 인연 못지않은 귀한 인연이 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두한이다.

▲ 1972년 후배 임수복의 결혼식 주례를 본 김두한. 우측으로 김길영, 이창수가 있다. 조일환은 신부 앞에서 차남을 안고 있다.
일본 최대 야쿠자 에도 회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 방일’ 담판

매년 김두한 기일에 후배들 1백여 명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와


“김두한은 민족투사였다”


“의송 김두한은 민족투사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을 상대로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맞섰으며 이후 박정희의 독재정권에도 한결같은 의지를 보여준 분이다.”

조일환이 김두한을 모시게 된 것은 5.16 민주화운동이 나던 해다. 당시 조일환은 22세였다. 인천의 엘리트 출신인 김길영을 통해 김두환이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을 전해들은 조일환은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두한이 조일환을 찾은 이유는 “조동지가 와서 내 밑에서 일 좀 도와 달라”는 것. 당시 김두한이 전국의 폭력조직을 상대로 조직한 ‘애국단’에서 비롯한 잡음이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이 약속한 ‘애국단’의 활동자금을 지급하지 않아 때 아닌 곤혹을 치루고 있던 김두한은 조일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조일환은 김두한 의원의 사무실에서 행패 부리는 사람들을 하나씩 저지해가며 이후부터 김두한이 작고하기 전까지 10여년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지조를 한번도 버리지 않고 권력과 손잡지 않은 의송 김두한은 늘 ‘가난한 민중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옷은 2벌뿐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여 있었으며 눈가는 항상 젖어있던 것으로 기억난다.”

조일환은 김두한을 보며 그의 성품과 기개에 닮고자 수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한창 나이인 54세에 명을 달리한 김두한을 보며 조일환은 울음을 삼켜야했다.

김두한은 청산리대첩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엔 종로 상권을 지키기 위해 젊은 청춘을 바쳤다.

해방 뒤엔 자유당 이승만 정권과 홀연히 맞서 항거하다 투옥되더니 박정희 군사정권 독재 치하에서는 사카린 밀수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에서 부정한 관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해 그 죄로 투옥, 고문을 받아 망신창이 몸으로 출소하기도 했다.

이후 의원직을 사퇴한 김두한은 고혈압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김두한의 죽음을 놓고 ‘타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당시 김두한의 임종을 지켰던 조일환의 명쾌한 해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김두한이 병원에서 생사를 오갈 때 밖에는 30여 명의 식솔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두한은 그중 나를 불러 마지막 유언을 남겼으나 지금까지 함묵해오고 있다. 김두한의 유언은 아직 밝힐 수 없지만 훗날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한다.”


“이젠 중국과 싸운다”
김두한은 유일하게 조일환에게 유품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병풍 8쪽이다. 솜씨가 좋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라 돈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절대 팔 수 없는 조일환의 귀한 보물이다. 그는 매년 김두한의 기일에 후배들 1백여 명씩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최근 조일환은 중국의 역사왜곡에 분통을 삭히고 있다. 근본적으로 뿌리를 흔들고 있는 중국 괘씸하기 그지없는 것. 그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소설집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주먹이라고 해서 무식하다는 편견을 없애야 한다. 편견을 없애기 위해 기본적으로 3시간씩 책을 읽어야 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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