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최대 폭력조직 ‘대호파’ 전 보스 이상훈

조폭 출신이 세계평화상을 수상했다. 18개 국가로 구성된 ‘2007년 세계평화상 시상위원회’에서 인권과 세계평화에 기여한 세계 1백78개국의 사람들을 선정해 심의한 결과 이상훈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본부 대표를 만장일치로 선정했던 것이다. 사실 이 대표는 세계평화상을 받기까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지난 1981년부터 1993년 동안 무려 13년6개월 동안 옥중생활을 했고, 그중 10년이란 시간을 엄중독방에서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 출소 후에는 사업가로서의 성공을 다짐했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서울 영등포 일대를 장악한 ‘대호파’ 조직의 보스 ‘원조 사시미’에서 이권운동가로의 변신까지 이 대표의 굴곡 많은 삶을 들어봤다.


아버지와 시라소니 의형제 사이 “큰아버님”이라 부르며 싸움 배워

초등생 때부터 유명한 싸움꾼, 고교시절 소매치기 두목 때려 눕혀


세계평화상을 수상한 직후 이상훈 대표는 더욱 바빠졌다. 이전에도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은 물론 재소자들을 위해 위문활동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그는 본인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은 수상자가 되고자 하루 24시간을 바쁘게 움직였다.

“큰 상을 받기엔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그 기쁨은 더욱 컸다. 하지만 기쁨이 큰 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뜻에서 준 상으로 알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더욱 봉사에 힘쓰겠다.”


해방촌서 어린시절 싸움으로 성장


이 대표는 지난 2004년 용천역 폭발사고를 계기로 본격적인 북녘 어린이 돕기 사업에 돌입했다. 이 사업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예견된 사업이었다.

그는 지난 1993년 12월25일 가석방으로 사회에 나와 중국 전 각지를 돌아다니며 청도, 상해 등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무역쇼를 통해 중국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과 샘플을 사다가 한국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마침 북한과 인접한 단둥지역을 지나는데 굶주린 북한 사람들을 보게 됐다. 북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은 이 대표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행색은 우리나라 전쟁 직후인 1950~60년대 모습을 하고 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중국인들의 식모살이를 했다. 욕설과 매질 등 부당한 대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그는 자신의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부모님이 이북분이셨는데, 전쟁 직후 핏덩어리인 나를 안고 평양에서 부산으로 내려왔다. 6살이 되던 해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실향민들의 정착지인 해방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실 조직 세계에 몸담게 된 것도 배고픔 때문이었다.”

해방촌에서 자라온 그의 가난한 추억은 오늘날 이 대표의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시라소니’로 더 유명한 이성순이 이 대표의 큰아버지란 사실은 어린시절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아버님이 시라소니와 의형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아버님이었고, 당시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 덕분에 당시 이화룡, 신의주, 정팔이 아저씨를 매일같이 보며 자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만주싸움, 신의주 싸움, 김두한 형님이야기를 비롯한 영웅담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싸움꾼들의 영웅담을 재미있게 듣던 이 어린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어느 날, 시라소니의 아들과 이 대표는 동네에서 악명 높은 쌍둥이 형제에게 맞고 들어왔다. 이를 본 시라소니는 자총지종을 들은 뒤 쌍둥이 형제에게 “비겁한 싸움이야”라고 말한 뒤 그날 저녁 이 대표에게 싸움의 기술을 알려줬다.

그는 그 후부터 매일같이 남산에 올라 나무에 동여맨 샛줄에 이마를 단련시키며 복수를 다짐했다. 한 달 뒤 쌍둥이 형제들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이 대표가 6학년 쌍둥이 형제들을 한방에 날려버리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한번 싸움에서 이기고 나니깐 자꾸 싸우게 되더라. 그때부터 인근의 초등학교를 돌며 대결을 펼쳤다.”

해방촌이 철거되면서 영등포로 이사를 오게 된 이 대표.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인근의 범법자를 때려눕히면서 뜻하지 않았던 소배치기 두목이 됐다. 이 대표가 다른 사람의 지갑을 털지 않았지만 소매치기범들이 그에게 돈을 바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대표가 조폭의 전철을 밟기 시작한 사건이다.



해밀턴호텔 난자사건, 서울남부지원 탈출사건 주범으로 징역 14년

출소 후 좌판상 열며 새삶 기도, 가발사업 승승장구해 북녘땅 도와



희대의 사건 ‘법정 탈출극’


이 대표는 조폭 세계에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그가 보스로 있던 ‘대호(大虎)파’는 1970년대 서울시 영등포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여러 조직이 규합된 영등포 최대의 폭력조직이었다.

영등포는 물론 인천까지 그 세를 확장할 만큼 영향력이 있던 조직으로 그 수장을 맡던 이 대표의 세력 역시 만만치 않았을 터였다. 그야말로 잘나가는 조직의 보스였던 셈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대표에게 큰 시련은 없을 줄 알았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포고령 13호에 의해 수배가 되면서 이 대표는 도주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사회 1면을 장식할 만한 사건은 계속 터져 나왔다. 조직의 동생들이 형사를 납치하여 구타하는 사건을 시초로 1981년 이태원 해밀턴호텔을 습격, 반대파 조직원들과 싸움으로 십수명이 칼로 상해를 입었다.

게다가 당시 검거에 나섰던 형사 5명은 손가락 등이 잘리기까지 해 일이 사건이 점차 커져갔다. 이후 쑥고개파 보스의 밀고로 이 대표가 경찰에 체포됐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이 대표는 재판을 지켜보러 온 어머니 코앞에서 법정탈출을 감행했다. 우리나라 교정 사상 전무후무한 탈출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대표를 비롯한 2명의 동생들이 탈출에 성공하자 이들의 현상금은 3천만원을 호가했다. 당시 간첩현상금이 5백만원이었던 것에 견주어본다면 얼마나 큰 사건, 위험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 수사당국은 발포명령까지 내렸다.

“보스의 세계에서는 밀고한 자를 살해해야 한다. 우리 조직을 밀고했던 쑥고개파 보스를 살해하기 위해 그의 은신처를 습격했으나 이미 도망간 후였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피신해 있던 북한산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도주 5일째 되는 날 당시 김도언 대검찰청 부장검사에게 직접 자수를 했다.”

이 대표는 징역5년, 감호 7년의 장기형을 받고 서울 구치소 특별 엄중독방에 갇히게 됐다. 0.85평 독방생활, 게다가 일반 재소자들까지 만날 수 없도록 해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죽음의 독방’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1983년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이후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에 부딪히게 됐다.

“처음 1년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시국사범들을 만나게 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시국사범들은 지칠 줄 모른 채 전두환 퇴진을 외쳤고 책을 나눠 읽었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독방에서 유일한 낙은 독서였다. 이때부터 앞으로의 인생은 인권운동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묘한 인연


당시 이 대표는 자신의 독방 앞에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야당 총재?DJ)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DJ는 하루에 한 시간씩 운동을 하며 꽃을 가꿨는데, 교도관들이 그의 식단을 개밥 취급하며 화단을 망가뜨리는 등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이 대표는 교도관의 이마를 들이박았다. 이 때문에 이 대표는 징벌을 받았고, 교도관 역시 좌천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인연이 남다르다. 본의 아니게 김 전 대통령의 처우 개선을 위해 시국사범들과 투쟁을 했었는데, 이후 김 전 대통령이 나와 ‘박영두 사건’을 위해 힘써줬으니 묘한 인연이 아닌가. 감사할 따름이다.”

박영두 사건. 이 대표는 재소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2천여 명의 재소자들과 단합하여 단식 난동을 벌였다. 난동이야 쉽게 제압당했지만 사건은 그 후에 발생했다. 동료 박영두가 교도관들의 구타로 사망했던 것.

당시 교도소측에서는 심장마비로 사건을 은폐했고 이에 격분한 이 대표는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네 자루의 칼을 만들어 교도관을 인질로 잡아 난동을 피웠다.

이 대표는 ‘고삐’의 작가 윤정모를 통해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에게 밀서를 띄워 인질 난동의 사유를 밝혔고, 이에 따라 박영두 사건을 포함한 인권침해 사건을 고소고발하게 됐다. 이 사건은 2001년까지 이어오다 무려 17년 만에 진상규명을 밝혀냈다.

수차례에 걸친 인질 난동과 단식 투쟁으로 추가징역형이 이 대표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그러나 당시 부장검사였던 김도언이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이 대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한 기자의 물음에 김도언 검찰총장은 “지금까지 맡아온 사건 중에 이상훈을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꼽았다. 이후 김도언 검찰총장은 이 대표가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왔고, 이로 인해 이 대표는 “김도언 검찰총장에게 누가 될까 무던히도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빛과 소금의 삶 살고 싶어”


이 대표는 1993년 1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가석방됐다. 이 같은 소식에 교도소는 발칵 뒤집어졌다. 교도소에서는 ‘골칫거리’인 이 대표를 잡아놔도 시원찮을 판국에 석방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 대표 본인 스스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13년6개월 만에 출소하자 사회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지하철을 타는 방법도 몰랐고, 세상 물정을 몰라 상인들의 얄팍한 속임수에 여러 번 당했다. 출소 이후 조직의 동생들이 세를 규합하고 다시 조직세계에서 일어설 줄 알았지만 화려한 세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직의 보스는 노력해서 돈을 벌기보다는 위세를 보여 대접받아 온 것이 사실이라 유혹이 많았지만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이 대표는 출소 후 부평역에서 안경과 시계 좌판상을 하며 경험을 쌓았고, 교도소에서 독학한 영어와 일어로 중국을 통해 가발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큰 수익을 얻은 이 대표는 귀금속사업에까지 발을 넓혔다.

그뿐이 아니다. 자신이 벌은 돈으로 북녘땅 어린이들의 배고픔을 채우며 세계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현재 세계 빈곤 국가를 방문해 그들의 참상을 널리 알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준비하고 있다.

“나의 지난 삶은 사회에서 버러지 같은 삶이었다”고 고백한 이 대표. “앞으로 남은 인생은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며 사회의 일원으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 50을 훌쩍 넘긴 그의 마지막 바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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