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논란에 된서리 맞는 박상천 민주당 대표

범여권이 이른바 ‘박상천 살생부’ 논란으로 시끌시끌하다.

민주당 박상천 대표가 여권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국정실패 책임자, 좌파성향인사, 친노 인사 등을 배제대상으로 꼽은 것. 이처럼 박대표가 대통합보다는 특정그룹을 배제한 소통합을 주장하면서 지지부진하게 끌어오던 범여권의 통합논의는 또 한번 좌초위기를 맞고 있다.

범여권은 박 대표의 배제론에 발끈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은 16일 당 지도부와 당내 초,재선 의원들이 합세해 박 대표의 배제론을 겨냥, ‘살생부 정치’, ‘정치적 알박기’ 등의 표현으로 맹비난하며 “박 대표의 노선은 중도개혁이 아니라 수구보수”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문석호 수석 원내부대표는 고위정책조정회의에서 “대통합을 자기 아집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일부 정치인이 있다”고 박 대표를 겨냥한 뒤 참여정부 실패 책임자 등을 통합의 배제대상으로 언급한 박 대표의 살생부를 거론, “특정세력은 안 된다는 것은 분열적 행태로 대통합의 장애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박 대표는 열린우리당의 집중공격에 때 아닌 된서리를 맞으며 달갑지 않은 조명을 받고 있다.

박상천 민주당 대표의 ‘살생부’가 불거진 것은 지난 11일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과의 회동자리에서다. 범여권은 이날 이뤄진 회동으로 통합논의의 첫걸음을 떼면서 범여권 정계개편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친노그룹 및 우리당 창당주역은 배제시키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반면 우리당은 특정인을 배제하고 통합을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맞서고 있어 또 한번 통합논의에 제동이 걸렸다.

박 대표는 이날 회동에서 ‘노무현 정부 국정 실패에 책임이 있는 전직 총리와 정책 노선 결정에 영향을 끼친 장관, 좌편향 노선을 고집한 전직 당 의장’ 등을 통합 배제 대상으로 거론했다. 박 대표의 배제대상은 친노 직계세력이나 진보 성향의 전직 우리당 의장 등을 겨냥하고 있다. 국정 실패 책임자 배제론은 참여정부와 선을 긋지 않고선 대선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민주당의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범여권 통합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박대표와 민주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열린우리당 지도부간의 기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양측은 공식적으로는 대화의 여지가 남았다고 말하지만 현재의 분위기로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대통합에 대한 근본적 시각차가 큰데다 감정의 골마저 깊어져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제정파를 단번에 하나의 틀로 묶는 대통합 방식보다는 일단 가능한 부분부터 소통합을 한 뒤 대통합으로 나아가자는 단계적 통합론이 탄력을 받고 있는 분위기다. 범여권 제 정파를 단번에 묶을 수 없다면, 작은 단위의 통합을 먼저 성사시킨 뒤 보다 큰 단위의 통합을 차례로 이뤄내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

박대표는 지난 17일 PBC 라디오에 출연, “대통합으로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대표는 특히 “현재 비한나라 인사가 다 뭉쳐서 정당을 만들자는 통합론과 내가 말한 대로 중도개혁인사들만 뭉치자는 두 통합론이 대립하고 있다”며 “비(非)한나라 통합으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민주당은 중도개혁세력의 통합을 추진했지, 열린우리당과 통합협상은 하지 않았다”며 “노무현 정권의 국정운영 실패에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협상하자고 얘기 안했을 뿐”이라고 협상중단 책임을 묻는 열린우리당의 비난을 반박했다.

박 대표가 선호하는 중추협 구상은 민주당과 통합신당, 우리당 내 탈당파, 민생정치모임 등 범여권 제 정파를 원탁회의에 참여시키고, 이를 모태로 해 중도개혁신당을 만드는 안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신당에 참여할 의원의 규모를 최소 50여명 정도로 내다보면서 6월 말까지 창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박대표의 이 같은 구상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열린우리당은 연일 박상천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특정인물 배제론을 두고 ‘살생부’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대표를 공격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통합의 방식과 대상 등을 놓고 양당 간 가파른 대치전선이 형성되면서 통합 논의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더 이상 기싸움에서 밀렸다간 민주당에 통합의 주도권을 고스란히 내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 핵심 당직자는 “우리당은 홀딱 벗고 물 속에 들어갈 준비가 돼있는데 박 대표 때문에 통합이 안된다”며 “박 대표와의, 분열주의와의 투쟁에 이기면 통합이 되고, 지면 총선도 다당제로 치르고 역사적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표가 통합의 배제대상으로 꼽은 정동영 전 의장도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 “백지장도 맞들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기준을 만들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느냐. 국민도 수긍할 수 없다”면서 “‘도로우리당’도 어렵겠지만 좀 더 그릇이 커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체의 기득권 포기, 국민 우선, 민주성, 개방성을 기준으로 통합을 추진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며 “시작도 하기 전에 분열과 편가르기, 배제를 얘기한다면 진정으로 통합을 원하는지 가슴에다 대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를 집중 타깃으로 한 우리당의 파상공세는 민주당 중심의 통합 흐름을 조기에 차단해 통합작업의 무게중심을 우리당이 내세워온 제3지대 통합으로 이끌어가려는 차원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박대표의 배제론에 대한 우리당의 공격에 대해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국정 실패 책임자들도 통합 대상에 넣자는 말은 대선 승리는 안중에도 없고 내년 총선에만 매달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유 대변인은 또 “우리당이 박 대표를 집중공격 하기로 내부전략 회의에서 결정했다는데,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폭력 노하우를 흉내내는 것 같다”며 “국정실패 책임자가 통합에 포함되면 아무리 새 옷을 입었다고 말해봐야 대선승리를 이룰 수 없다. 인신공격과 인격모독을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인기 의원은 “민주당은 살생부의 ‘살’ 자도 꺼낸 적이 없는데, 이에 해당하는 본인들이 스스로 제 발이 저려 소란을 떤다”며 “민주당이 지향하는 통합정당은 국정 실패의 책임을 씻어 내주는 세탁소가 아니다”고도 했다.

박 대표도 연일 계속되는 우리당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배제론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박대표는 “우리는 열린우리당과 통합하려는 게 아니고 민주당과 이념이 같은 중도세력과 통합하려는 것”이라며 “그런데 자기 쪽과 통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살생부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 것.

이같은 박대표의 태도에 우리당내에서는 협상중단론에 자체 리모델링론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당 초.재선 의원들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배제론에 굴복하기보다는 리모델링을 통해 승부를 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리모델링론이 현 시점에서 적절치 않고 2.14 전당대회의 대통합 결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지만, 민주당이 끝내 강경론을 고수하고 ‘제3지대’ 형성이 여의치 않을 경우 열린우리당에 잔류해 리모델링에 참여하는 선택이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새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대표를 둘러싸고 통합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지난 18일 5.18 민주항쟁 27주년을 기념해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각 당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행사장의 첫줄에는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김한길 중도개혁 통합신당 대표, 박상천 민주당 대표가 나란히 앉았다. 김 대표와 박 대표는 간혹 덕담을 나누기도 했으나 정 의장과 김 대표 및 박 대표는 시종일관 외면했다. 열린우리당-민주당 간에 깊어진 감정의 골과 민주당-중도개혁통합신당 간의 소통합 기류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박상천 대표는 행사 직후 기자들과 만나 “대통합은 대선 승리를 위한 것”이라며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잡탕 정당이거나 정권 실패 책임 세력과 함께 해서는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다”며 자신의 ‘통합 대상 배제론’을 또 한번 분명히 해 범여권 내에서의 후폭풍이 예상된다.

이번 파문이 범여권 통합에 어떻게 작용할 지에, 그리고 박상천 대표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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