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를 옹호하는 발언은 '진짜뉴스'이고 아니면 가짜뉴스?
"경제의 기초체력은 튼튼하다"는 발언은 1997년 외환위기 연상시켜
진짜 합리적 사고는 손익을 잘 따지는 수학적 사고, 이게 포퓰리즘을 막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비상한 각오로 엄중한 경제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하되, 근거 없는 가짜뉴스나 허위정보, 과장된 전망으로 시장의 불안감을 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은 튼튼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가짜뉴스란 무엇일까. 혹시 문재인 정부에 불리한 뉴스는 가짜뉴스이고,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뉴스는 진짜뉴스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구분법은 자신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트럼프식 구분법’인데... 무엇보다도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정부에서 “우리 경제의 펀더멘탈(기초체력)은 튼튼하다”고 했던 말이 자꾸만 기억나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은 뉴스가 온 세상에 넘쳐난다. 뉴스를 전하는 매체도 너무나 많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에서 ‘새 소식(뉴스)’을 전하다보니 상품뿐만 아니라 뉴스에도 ‘똑똑한 소비자’가 될 필요성이 커졌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지식을 쌓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똑똑한 뉴스 소비’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 소식’을 의미하는 뉴스도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다. 사실(fact)를 그대로 알려주는 진짜 뉴스, 전혀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 그리고 진짜와 가짜의 중간에서 반쪽 진실만 알려주는 포스트트루스(탈진실, post-truth)까지 존재한다. 가짜뉴스는 사실 확인을 통해 걸러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포스트트루스다. 포스트트루스는 합리적 근거보다 감정에 의해 선택되는데, 이러한 반쪽 진실은 자기편에 의해 크게 각광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성과 정보보다는 감성에 더 크게 반응하고, 믿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보다는 감성에 좌우되는 사람들을 일컬어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한다. 바꾸어 말하면 합리적이란 얘기는 감성보다 이성에 기초해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합리적’이라는 단어가 수학과 연결돼있다는 점이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영어로 ‘rational’이다. rational의 어원은 라틴어의 ‘ratio(비율)’에서 나왔다. ratio 즉 비율은 둘 이상의 수나 양 따위를 비교하여 그 관계가 서로 몇 배가 되는지를 수치로 나타낸 것으로 ‘나누기’와 관련이 있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돈이나 상품을 서로 얼마나 잘 나누는지를 나타내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예컨대 상거래에서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 되도록 공정한 비율로 잘 나누는 행위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합리적(合理的)이란 단어는 한자어로 ‘이치에 맞는다’는 의미인데,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오히려 합리적(合利的) 즉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의미다.

사람이 ‘ratio(비율)’을 잘 이해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한다. 세상사를 보고 어떤 행동을 할 때 얼마나 이득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잘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선택하면 그게 몇 점짜리 정책인지 생각해보는 게 바로 합리적인 사고다. 언뜻 들어서는 그럴 듯하지만 잘 따져보면 손해가 되는 말이나 약속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말로 ‘합리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세상을 ‘선악의 잣대’로 보고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혹은 나쁜 사람이야’라면서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합리적인 인간이 되기 어렵다. 예컨대, 법원에 가면 벌금형부터 2년 징역형, 10년 징역형, 무기징역형, 사형 등 판결내용이 다른데 이를 몽땅 ‘나쁜 놈’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합리적 사회가 되기 어렵다.

합리적 사고를 ‘비판적 사고’라고도 부르는 데,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수학·과학·통계학 지식을 중시해야 한다. 문제는 세계 각국의 국민 다수가 수리 능력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 특히 수리 능력을 갖췄더라도 정치적 신념에 매몰돼 쉽게 비합리적인 성향으로 변해버린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인들의 달콤한 약속 즉 포퓰리즘에 빠지기 쉽다. 정치인의 사기술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 <타임머신>과 <투명인간>을 쓴 공상과학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수학적 분석 방법을 적절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끝없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이에 관해 사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손익을 잘 따져보는 수학을 잘 활용하는 사람, 즉 진정하게 합리적인 사람이 정치와 경제현상에 대해 제대로 된 접근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짜뉴스, 탈진실 뉴스, 진짜 뉴스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 진짜 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합리적인 사고, 즉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는 세상을 보다 분석적으로 보는 서양인들이 더 강했다. 동양에서는 미세한 차이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사고에 대해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스(胡適)는 <차부뚜어(差不多)선생전>에서 유머와 해학을 섞어 따끔하게 그 폐해를 꼬집고 있다. ‘차부뚜어 사고방식’이 지금 우리에게도 많이 남아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무엇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가짜뉴스’의 진짜 정의가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를 의미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조국 법무장관 지명자의 ‘ ‘부역· 매국 친일파’라는 표현이나, 김현종 국가안보실2차장의 ‘글로벌 호구’ 혹은 ‘일본 영향은 한 줌’이라는 거친 언어들은 정부를 옹호하는 것이므로 진짜 뉴스일까. 그렇게 우긴다고 세상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어 진실이 가려지지는 않을 터인데.

여러 가지 뉴스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잠시 후스가 쓴 <차부뚜어 선생전>을 보고 생각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싶다.

<차부뚜어 선생전>

여러분,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사람을 말하자면, 모두가 알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성은 차(差,) 이름은 부뚜어(不:多 . 차부뚜어란 그게 그거다, 별 차이 없다는 뜻)로, 각 성의 현 과 촌에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분명 그를 본적이 있고, 분명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차부뚜어 선생의 이름은 세상사람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차부뚜어 선생의 외모는 당신과 저의 외모와 별 차이 없습니다. 그는 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 잘 보지 못합니다. 두 귀가 있지만 잘 듣지 못합니다. 코와 입이 있지만 냄새와 맛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의 머리는 작지 않지만, 그의 기억력은 흐리고, 그의 생각 역시 주도면밀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별 차이 없으면 그걸로 족하다. 굳이 정확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릴 적 그는, 어머니가 붉은 사탕을 사 오라고 하면 흰 사탕을 사서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가 꾸짖으면,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붉은 사탕과 흰 사탕은 별 차이가 없지 않나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직례성의 서쪽에는 무슨 성이 있을까?” 라고 물으면, 그는 ‘산시’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틀렸어. 산시가 아니라 산서야” 라고 지적하면 그는 “산시와 산서는 별 차이 없지 않나요?” 라고 대답했다.

훗날 그는 상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는 글을 쓸 있고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정확하지 않을 뿐이었다. 십(十)자를 자주 천(千)자로 잘못 쓰거나, 천(千)자를 십(十)자로 잘못 썼다. 상점 주인이 화가 나 자주 그를 욕했다. 그는 웃으며 화난 것을 풀어주려 말했다. “천(千)자와 십(十)자는 삐침(획) 하나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 별 차이 없지 않나요?”

하루는 급박한 일이 생겨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가야 했다. 그는 천천히 기차역으로 걸어가 2분을 늦었다. 열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는 눈을 한번 흘겨보고 멀리 떠나는 기차의 연기를 바라본 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일 가면 되지.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별 차이 없지 않은가. 기차회사가 너무 열심히 일하네. 8시 30분에 떠나나 8시 32분에 떠나나 별 차이 없지 않은가” 그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속으로는 기차가 왜 2분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줄곧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병을 얻어, 가족이 동쪽 거리에 사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갔다. 가족이 급히 뛰어갔지만 의사 선생님을 찾을 수 없어 서쪽 거리에 사는 수의사를 모셔왔다. 차부뚜어 선생이 병이 들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사람을 잘못 데려온 줄 바로 알았다. 하지만 병이 위중하여 고통이 심하고, 마음이 급해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의사나 수의사나 별반 차이가 없으니, 그에게 진료하라고 해야겠다.” 이에 수의사가 그의 침대 앞으로 다가갔고, 소를 진료하는 방식으로 차부뚜어 선생의 병을 진료했다. 1시간을 못 넘기고 차부뚜어 선생은 숨을 거뒀다.

차부뚜어 선생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힘겨운 목소리로 말하길 “산 자와..죽은 ..자는 별반.. 차이가.. 없다... 무릇 ...별 ..차이 ..없으면... 되는 것이다...굳이....그렇게..열심일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를 차부뚜어 선생이라 칭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두가 그를 두고 일생동안 열심히 살지 않았고, 결단을 내려 본 적이 없으며, 따져본 적이 없었지만 진정으로 ‘덕이 많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에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 ‘원통(圓通:융통성)대사’라는 법호를 부여하였다.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널리 전해져 점점 커졌다.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이에 모두가 차부뚜어 선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게으른 자들의 나라(라인국, ?人?)’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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