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대한민국에 ‘부자 열풍’이 불었다. 한 신용카드사가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를 띄워 대박을 냈다. 이듬해인 2003년부터는 ‘1억 만들기’ ‘10억 만들기’ 등 구체적인 목표 액수까지 제시되며 재테크가 크게 유행했다.

모두들 알다시피 부자 되기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자가 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 나오더니 급기야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젊은이들의 좌절감에 편승해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벌려는 얼치기 지식인들이 급기야 부(富)와 부자들을 조롱하고 불평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치인이 가세하고 교수들도 편승했다. 앞에서는 부(富)를 공격하고 뒤에서는 부자가 되려고 온갖 파렴치한 짓을 벌이는 위선적인 사람들도 급격히 늘었다. 그런 분위기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 유명대학의 한 교수는 신문 칼럼에서 “10% 부자정당 민주당도, 1% 수구 부자 자유한국당도 지지할 수 없는 청년과 서민들은 마음을 줄 데가 없다”고 썼다. 정치를 비하하며 수치를 조작해가면서 노골적으로 자유한국당을 더 나쁜 정당으로 매도하고 부자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다. (의원 평균재산의 진실은 민주당이 38.6억원, 자유한국당이 29억 원이다) 자신이 억대 연봉을 받고 최소한 상위 3% 이내에 포함되고 특권계급임이 분명한데도 그 부분은 쏙 뺐다. 그러면서 “부유세, 토지공개념, 기본소득, 성평등, 환경 정의 같은 가치로 단결하여 1% 특권계급과 10% 부자들의 카르텔에 파열구를 내도록 힘을 합쳐 지혜를 짜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참으로 쓴웃음만 나오는 대목이다.

부(富)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부(富)가 어떻게 형성되고 부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자는 ‘본인이나 선대의 인기 끌기(성과 올리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음 사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꽃보다 청춘’‘윤식당’ ‘삼시세끼’ ‘스페인 하숙’을 만든 나영석 PD는 예능분야에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으로도 불린다. 나영석 PD는 지난해 37억 25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급여는 2억 1500만 원이고 상여금은 35억 1000만 원이다. 나영석 PD의 예능물이 인기를 끈 덕분이니 그를 고소득자이자 부자로 만들어준 사람은 대부분 평범한 소득으로 살아가는 시청자들이다.

축구선수 손흥민은 독일의 함부르크와 레버쿠젠을 거쳐 2015년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토트넘으로 옮겼다. 그가 매주 받는 급여는 6만 파운드(8945만원)에서 시작했으며 2018년에는 재계약을 통해 주급 14만 파운드(2억875만원)까지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봉으로 약 108억 원이다. 손흥민을 부자로 만들어준 사람들은 열렬한 축구팬과 그가 나온 광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손흥민은 올해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맨체스터시티를 맞아 1차전 한 골, 2차전 두 골 등 총 세 골을 넣어 토트넘의 영웅이 되었다. 당연히 인기가 더 오르고 돈도 더 많이 벌 것으로 예상된다. 피겨스케이팅 스타인 김연아는 우리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사랑과 지원을 받은 덕분에 지금도 수십억 원을 버는 ‘광고 퀸’으로 군림한다.

기업인들이 돈을 버는 비결도 나영석 손흥민 김연아와 비슷하다.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과 서비스 즉 인기상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기를 얻지 못한 PD나 선수들은 여전히 힘들게 살고, 인기상품을 만들지 못한 기업인은 망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국민들에게 인기 높은 설탕과 의류를 만들면서 성공의 길을 열었다. LG의 역사는 비누와 치약의 인기 덕분에 만들어졌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부자였다는 록펠러는 흔히 악덕 독점자본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실상 그의 성공은 합리적인 경영을 통해 갤런 당(약 3.8리터) 58센트였던 석유를 갤런 당 8센트로 내림으로써 이룩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이 석유를 7분의 1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록펠러와 같이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던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란 분이 있는데 그의 기부금으로 인해 한국의 첫 근대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만들어졌다)

기업인들 가운데 최근 고인이 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의 엇갈린 행보도 눈길을 끈다. 두 분은 요즘 얘기로 ‘금수저’인데 기업 경영의 성과는 달랐다. 조양호 회장의 선친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는 화물운송으로 성공해 항공업에 진출했는데, 한진이란 회사명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에서 따왔다. 조양호 회장이 경영한 대한항공은 지난해 12조6,512억 원의 매출로 창사 이래 최대 성과를 냈으며 6,924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금호아시아나의 출발은 박삼구 회장의 선친인 박인천 창업주가 택시 2대였으며, 이후 버스사업에 진출해 성공했다. 박삼구 회장이 경영한 아시아나항공은 설립 이후 적자를 면치 못했다가 2016년 구조조정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 매출은 7조 1833억원으로 사상 최대였으나 영업이익은 282억 원에 그쳤고 당기순손실이 무려 1959억원에 달해 재무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급기야 금융권 지원을 받지 못해 아시아나항공을 팔아야하는 처지에 몰렸다.

많은 사람들은 나영석 손흥민 김연아가 부자되는 것에는 반감을 표시하지 않지만, 기업인 2세 3세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자신도 부를 쌓으면 자녀들에게 상속시키려고 하면서 기업인들의 상속에는 모 대학의 교수처럼 핏대를 올린다. 이는 기업 경영의 성공 비결이 ‘인기 끌기’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 정경유착으로 보는 편협함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기업 경영을 바라보는 기묘한 시각도 한 몫을 한다.

예전에 어떤 분이 자신의 글에서 “내가 아는 일본인 친구가 한국에서 제일 쉬운 일은 기업 경영이고 더 쉬운 일은 재벌그룹 경영이라고 말해 입맛이 씁쓸했다”고 썼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이미지는 드라마를 보면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상속자면 무조건 회장에 취임하고 실무 경험이나 능력 검증 없이도 경영을 맡는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우리 드라마에서는 회장님과 사장님이 빠진 적이 없고, 외국 유학만 다녀오면 핏줄이라고 그냥 임원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 드라마에서 기업 경영은 ‘극한 직업’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중소기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주류인데, 평범한 직장인이 가업을 이어받고 겪는 어려움과 분투 등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드라마 중 어떤 게 현실에 더 부합할까.

기업경영의 어려움은 국내 대기업 흥망사에서도 숱하게 나타난다. 1960년대의 10대그룹이던 삼호 개풍 대한 동양 극동 한국유리 동림산업 태창방직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제 동명목재 명성 삼풍 등도 한순간에 사라졌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우 쌍용 동아 삼미 한일합섬 기아 해태 대농 등도 사라지거나 계열사별로 흩어졌다. 그러한 역사는 대부분 기억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금수저도 경영을 잘못하면 ‘쪽박 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기업 경영과 기업인을 우습게 보는 나라와 기업 경영의 어려움과 기업인을 인정하며 우대하는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이길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부자들은 나쁘다’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생의 지혜를 잘 아는 현인들은 “부자가 되려거든 부자를 닮거나 최소한 부자와 친해지라”고 조언한다. 부자들은 어찌됐든 스스로나 아니면 그 부모들이 ‘인기 끌기’를 통해 부를 쌓은 사람들이다. 그걸 나무라거나 비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경우도 없고, 세상 사람 누구나 자신의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본능이기 때문이다. 부의 상속과 그에 따른 불평등을 무지막지하게 비난했던 사람들도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나라가 잘 되려면 부자가 많아야 한다. 부자 숫자가 많으면 나라에 득이 되며, 부국에는 부자가 많다. 아시아에서 홍콩 싱가포르 등은 상속세가 없는데, 그 때문에 많은 부자들이 그 나라로 주거지를 옮겼다. 소비의 큰 손들인 부자들이 많아지니 당연히 나라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럼 ‘부자를 미워하는 나라’는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서 사라진 소련,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 그리고 김일성 세습 정권인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운명은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마지막 길을 떠난 조양호 회장의 영면을 기원한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