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판결 분석보고서를 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를 근거로 한 법원 판결들을 분석해낸 자료다. 판사들의 이름을 밝혀야 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벌인 헛된 논란에 의미가 다소 퇴색된 감이 있지만,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에 인권이 침해된 사례를 밝혀 다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사업이다.

긴급조치는 말 그대로 ‘긴급한 조치’다. 그런 말뜻과 별개로 진실화해위가 정리해 발표한 사안들을 보면 아주 가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고 윤보선 전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고 장준하 선생 같은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파렴치한 독재정부에게 있어 지명도 있는 민주인사는 그 존재 자체가 ‘긴급상황’이었겠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일들이 아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어떤 점술가는 “1인 독재인데다가 빈부차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했다가 징역에 자격정지 2년을 받았다. 다른 광부는 “독재정치는 계속 이어질 거야. 대대로 할지도 몰라”라는 말을 했다가 징역 2년을 살았다. 한 농부는 “정치는 잘하는데 독재다”라는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로 징역 2년에 그나마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이다.

‘긴급조치’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1974년 1월 8일부터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차례로 발표한 초헌법적인 조치다. 이중 긴급조치 9호는 1호부터 7호까지 내용을 집대성해 1975년 5월 13일 발동한 마지막 긴급조치다. 이 조치에 따르면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해 전차하는 행위, 박정희 정권의 입맛에 맞게 제정된 당시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행위는 모두 처벌을 받았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초헌법 아니 무헌법적인 상황이었다.

긴급조치는 법으로 정해진 것이었으므로 판사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은 나 역시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납득을 원한다면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과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바로 지금 필요한 ‘긴급조치’다. 판사들의 실명 공개가 사안의 본질에서 벗어난 시비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원칙을 지킨 자는 실명으로 검증을 받을 것이고, 사리를 추구한 자는 익명 속에 숨으려 할 것이다.

이런 헛된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직 윤리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일반 국민의 상식 선에서 법관에게 요구하는 일정한 윤리의식이 있다. 어떤 대선후보는 이번 발표를 두고 ‘정치공세’ 운운하는데, 이처럼 민주주의를 대놓고 부정하는 발언에 사상검증을 ‘긴급히 조치’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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