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계 반세기 역사 재조명

지난 50여 년간 재계의 변화상을 살펴보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눈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며, 세력의 유지를 위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한다.
또한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는 협력이라는 과정을 통해 해법을 모색하기도 하며 ‘그들만의 룰’에 의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힘’도 발휘했다.
하지만 1997년 IMF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재계는 큰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더불어 구조조정이라는 과정을 통해 수많은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가실 줄 모른다.
과거부터 이어져 오던 재계의 행보를 들여다보면 미래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직도 힘차게 돌고 있다.

1964년 당시 상위 10대 재벌에 들었던 기업 가운데 현재까지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삼성과 LG에 불과하다.
이는 재벌그룹에 속했던 숱한 기업이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이합 집산하면서 유력 재벌들을 중심으로 재편된 사실을 의미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1964년 당시 10대 기업집단은 삼성, 삼호, 삼양, 개풍, 동아, 락희(현재의 LG), 대한, 동양, 화신, 한국 글라스 등의 순이었다.
당대를 풍미 했던 대표적 자본가인 이정림(개풍), 설경동(대한), 정재호(삼호), 박흥식(화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일제시대에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재벌이 된 기업들이 경제개발기의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10대 기업집단 중 삼양, 개풍, 동아, 동양, 화신, 한국글라스가 10위권에서 밀려났고 대신 현대, 한국 화약, 동국, 효성, 신동아, 선경, 한일합섬이 진입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동국, 대한, 신동아, 한일합섬이 밀려나고 대우, 쌍용, 한진, 대림, 한국화약(재진입) 등이 새로 진입했다.
1960년대 10대 기업집단의 변화는 60년대 후반 극심한 불황의 영향이었다.
외부자금 의존도가 높고 산업구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단순 소비재 기업들이 대거 도산했고, 건설과 석유화학 기업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70년대 중반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중·화학공업의 약진은 재계판도를 크게 바꿔놨다.
1980년대 초 신군부가 주도했던 중화학 투자 조정 과정에서 성장 한계에 부딪힌 기업들은 철저히 몰락한 반면 첨단산업에 눈길을 돌려 사업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꾼 기업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재벌들이 점차 확장일변도로 커가면서 경제력 집중의 폐해가 두드러지자 공정거래위원회가 30대 기업집단을 지정해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이때가 되자 이미 대기업 집단에 이름을 올린 기업들은 영향력이나 규모 면에서 상당히 안정됐고 한동안 재계 순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 30대 기업집단 기업들은 순위만 조금씩 오르내렸을 뿐이다.
다만 재계 15위권을 유지했던 범양상선의 몰락만이 특이할 만한 변화였다.
10위권 이내도 효성, 대림 대신에 금호, 롯데가 진입했을 뿐 대체적인 판도는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변화가 일기 시작한 시점은 1995년.
이른바 복합 불황이 다가오면서 20∼30위권 기업들 사이에 일대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건설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우성, 극동, 벽산 등 중견 건설사들의 경영이 급격히 위축됐고 결국 1996년 30대 기업집단에서 제외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자금은 부족한데 돈 나올 곳은 없었고 이미 건설경기 침체에 허덕이던 건설사들은 큰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차입경영으로 급격히 사세를 불렸던 회사들이 당시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30대 기업집단 판도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1997년 외환 위기였다.
1998년 들어 1997년에 30대 기업으로 지정됐던 그룹 가운데 대우, 기아, 한라 등 9개 기업이 탈락했다.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돼 눈총을 받았던 기아는 한때 8위까지 올랐으나 환란이 엄습하기 시작한 1997년 11월 19일자로 30대 기업에서 제외됐다.
최고경영자의 무분별하고 불법·탈법적인 경영스타일로 인해 기업 전 체가 위기에 빠진 사례도 꽤 있었다.
재무구조가 극히 부실했음에도 뇌물 로비로 권력실세들의 지원을 받아 철강 산업에 진출했던 한보그룹이 대표적이다.
한보는 1987년 25위였으나 한동안 순위에 들지 못하다가 1994년 다시 28위로 등장, 1995년 18위, 1996년 14위로 승승장구 했다.

한라그룹 역시 설비증대를 위해 무리하게 추진했던 추가 도크 건설로 인해 이자부담에 시달리면서 경영위기를 맞고 자산과 지분을 대폭 매각해야 했다.
대우의 몰락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1980년대 2위까지 올랐다가 1990년대 들어 3∼4위를 달렸던 대우는 1999년 삼성을 제치고 재계 2위에 등극했지만 이제는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1998년 재계순위 10위에 위치했고 리비아 대 수로공사로 한국 건설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동아는 30대 기업집단에서 제외된 데 이어 워크아웃을 거쳐 파산 선고까지 받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2001년 들어서는 ‘5대 그룹’(현대 삼성 LG 대우 SK) 이라는 명칭도 ‘빅4’(삼성 현대 LG SK)로 대체됐다.
공정위의 발표에 따르면 4위인 SK의 자산 규모는 45조9천억원(2001년 4월 기준)으로 6위인 한진(21조원)보다 2배 이상 많다.
현대자동차가 35조 8천억원으로 5위에 올랐으나 ‘빅4’는 다른 그룹이 감히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격차를 벌려 놨다.

2001년에는 민영화가 진척되면서 민간 기업으로 거듭난 포항제철이 재계 7위에 올랐다.
재계에서는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두산그룹의 10위권 진입이 멀지 않아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롯데의 상승세 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모 언론에서 발표한 재계의 변화상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IMF 당시 396.3%에 달했던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2005년엔 86%로 대폭 낮아졌고, 현금유보율은 평균 609.34%에 달하고 있다.
과거 기업들의 창고를 가득 채웠던 빚이 현금으로 바뀐 것이다.
‘빅딜’과 기업들의 체질 개선으로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은 한국 경제의 젖줄로 급부상했다.
1위 기업의 독주 역시, IMF 10년이 빚어낸 작품이다.
IMF 이전 대기업집단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던 현대와 2위 삼성의 자산 총액 차이는 불과 1조9천460억원에 그쳤다.

하지만 현재 삼성은 2위에 오른 한전보다 12조9천920억원이나 몸무게가 더 나간다.
사실상 재계 2위에 오른 현대차그룹과는 무려 53조6천890억원으로 벌어져 ‘삼성 천하’를 실감케 하고 있다.
업종별로도 ‘1위 신드롬’이 한국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업종별 1위 기업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고, 후발 주자들은 마이너 리그에서 생존을 담보로 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자연스레 기업 간 수익양극화 현상은 한국 경제의 그늘이 되고 있다.
지난해 3/4분기 경상이익률이 20%를 웃도는 고수익 업체 비중은 6.7%로 계속해서 높아진 반면, 상장·등록 제조업체 3곳 중 한곳 꼴로 여전히 경상적자에서 허덕였다는 사실은 양극화 현상의 단면일 뿐이다.

올해 최대의 이슈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M&A시장으로의 진출이다.
이와 관련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재계의 여론을 감지한 듯, 정부에서는 이를 완화하는 법안을 마련했지만 재계는 이 기준에 만족치 않고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총제가 토종자본의 대형 M&A를 막는 규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한해는 대현 M&A의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가장 눈에 띈다.
작년 한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의 ’최대어’중 하나로 꼽힌 대우건설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거머쥠에 따라 재계 판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준 것으로 확인 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자회사인 금호산업과 대우건설을 합쳐 최강의 건설그룹으로 탈바꿈하게 됐고, 건설분야를 그룹의 차기 성장 동력중 하나로 키울 수 있게 됐다.

또 다른 ‘역사’를 위해

이를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 인수로 그룹 내 건설 부문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그룹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 재계 순위 10위권 이내로 올라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 한해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M&A.
작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그랬듯, 재계의 숨 막히는 지각변동의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획을 그을 ‘사건’으로 기록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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