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 붐과 함께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재난 만화'의 갖가지 양상을 살펴본다

'자연재해' 속에서의 인간탐구 사실상 모든 종류의 '재난 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볼 수 있으며, 또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들 '자연재해' 만화는 다시 세 분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일본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연재해를 다룬 만화들과 '전인류적 재해'를 겪는 생존담, 그리고 자연재해에 의해 모처에 격리되어 펼쳐지는 갈등 드라마가 바로 그것. 첫 번째 경우의 만화들은 1970년대에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소설이자 영화 <일본침몰>에 큰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일본의 '고정 재해'에 속하는 '지진'으로 인해 일본이 침몰된다는 공통된 소재를 담고 있다. 재밌는 점은, 이들 만화들이 보여주는 재난의 양상마저도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쿠도 카즈야, 치바 키요카즈 콤비의 <일본대침몰>과 <침묵의 함대>로 유명한 국수주의 작가 카와구치 카이지의 <태양의 묵시록>은 모두 '일본열도가 반으로 나뉘어져 분리된다'는 동일한 재난의 형태를 배경으로 정부와 민간인들 사이의 여러 마찰과 혼란을 그려내고 있다. 한편 '전인류적 재해'를 소재로 한 만화는 기본적으로 일본 재난 만화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고르고 13>의 '사이토 다카오'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가 그린 <생존게임>과 <브레이크다운>은 동일 장르 내에서 '클래식'으로 여겨지는 작품들로서, 가히 지구붕괴급의 재난이 닥쳐온 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 모종의 '생존전략'을 차례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큰 주목을 받아냈다. 사이토 다카오의 '공식'을 깨고 동일 장르의 개혁을 가져온 작품으로는 엄청난 대중적 인기와 문화적 파급효과를 가져온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걸작 <드래곤헤드>를 언급해볼 수 있다. '알 수 없는 재난'으로 인해 지옥구덩이가 된 일본을 차례로 밟으며 인간성의 파괴와 가치의 말살을 목격하는 두 남녀 주인공을 통해 모치즈키는 보다 철학적이며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무겁게 침잠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야마다 요시노부의 <소년표류EX>는 얼핏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엄청난 해일에 의해 배가 표류하여 외딴 섬에 어린 소년소녀들이 고립, 이후 이들이 격렬한 갈등상황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재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위급 상황에서의 인간의지 격돌'이라는 점에서 <소년표류EX>는 분명 '재난 만화'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재난 만화 특유의 '외부적 위협감'이 결여되어 있어 어딘지 심심하고 박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인재'를 막으려는 사람들 최근 들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장르이다. 일명 '구조 만화'라고 따로 분류가 되기도 하며, 헐리우드의 '재난 영화' 붐이 '인재'를 바탕으로 한 '구조'의 소재 - 일례로, 존 길러민의 <타워링>이 있다 - 로 시작되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만화의 경우는 상당한 후발주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구조 만화'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119 구조대의 화재진압 현장을 담은 소다 마사히토의 <출동! 119 구조대>는 <슬램 덩크> 이후 청소년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였고, 비슷한 터치를 가미한 코모리 요이치, 사토 슈호의 <해원>은 해상 보안관의 각종 구조작업과 구조훈련을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이들 '구조 만화'는 박력있는 그림체로 아비규환의 재난 상황을 하이퍼-리얼리스틱하게 묘사하고, 한껏 과잉된 감정곡선을 통해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능한한 끈끈하게 다루어, 다소 냉소적인 개그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에 '열혈물'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던 많은 팬들을 일거에 운집시킨 장르로 일컬어지고 있다. 최근 만화 유행 추세가 잘 짜여진 플롯보다는 공들인 동작 묘사와 화려한 액션 연출로 기우는 경향임을 감안해보면 '구조 만화'는 현재의 인기도를 계속해서 갱신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한편, 헐리우드 영화가 1990년대 중반에 '살인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재난 영화 패러다임 - 볼프강 페터젠의 <아웃브레이크> 등 - 을 만들어내자, 일본 만화 역시 이를 전면적으로 수용, 새로운 종류의 재난 만화 형태를 탄생시켰다. 그 대표작으로는 <마스터 키튼>, <몬스터> 등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을 들 수 있으며, 이들 만화는 자연재해 만화의 '전인류적 재해' 배경에 '인재'의 요소를 끼워넣어 '테크놀로지 묵시록'이라는 흥미로운 비젼을 제시했다고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일부에선 1980년대 전세계 문화예술계를 휩쓸었던 '핵전쟁 이후의 세계' 소재의 '현실가능한' 변주 정도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동시에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 '인재'를 바탕으로 한 재난 만화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 결국 수그리고 적응해야만 한다는 '자연재해 만화'의 패배주의적 발상과 달리, '인간이 일으킨 일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적극적인 극복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적극적 방향성 탓에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세대가 그토록 열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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