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중항쟁 기간 가두방송으로 항쟁의 불씨를 던져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광주에서는 많은 학생,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여러분! 즉시 도청 앞으로 모여 계엄군에 대항해 싸웁시다!” 광주 시민들은 이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80년 5월 광주에서 가두방송으로 광주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주인공이 바로 전옥주씨다. 광주는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부터 희생양이었다.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경제가 낙후되었으며 언제나 우리 민족을 동서로 가르는 지역감정의 볼모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며 투쟁해 온 민주투사의 고장이었다. 신군부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하였던 것은 정신적 측면에서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유혈 진압으로 5∙18민중항쟁은 끝이 났지만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다. 5.18민중항쟁 당시 청바지에 빨간 점퍼를 입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묶고 군중대열 맨 앞에서 시민군을 리드하고, 거리를 돌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가두방송을 하는 여자가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광주에서는 많은 학생,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여러분! 즉시 도청 앞으로 모여 계엄군에 대항해 싸웁시다!” 광주 시민들은 이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가두방송으로 광주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주인공 전옥주씨를 만나보았다. 가두방송을 하게 된 계기는? 1980년 5월 19일 서울에 있다가 이모의 심부름으로 광주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광주는 계엄군의 살기와 시민들의 분노가 뒤엉켜 도시전체가 광기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는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시민의 주검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당시 광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광주시민들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상황을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21일 새벽 광주 신역에 시신 2구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신역으로 갔습니다. 두 눈이 파헤친 참혹한 시신이었습니다. 시신을 확인한 후 그 두 시신을 버스에 실을 수가 없어 리어카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시신들을 리어카에 싣고 태극기를 덮은 후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모금한 47만원으로 마이크와 앰프를 구했었으나, 계엄군의 최루탄으로 이미 파괴되어버린 다음 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운동 동사무소에 들어가 방송시설을 대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담당 공무원이 국가재산이라 대여를 꺼렸습니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새벽 5시까지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강제로 방송장비를 가지고 나왔고, 숙직실에 제 사비 7만원을 놓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긴박한 상황으로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도청으로 가면서,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발포명령이 있기 전에 이미 발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가두방송을 계속 하였습니다. 항쟁이 격화된 전남도청 앞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오전 8시 경 전남도청 앞은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가두방송을 하던 저는 계엄군 측에 살해당한 두 구의 시신을 보여주며 “어떻게 이렇게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할 수 있느냐”고 방송을 하고, 시민군들에게는 시위의 정당성을 호소하였습니다. 시민군은 계엄사령관을 만나 광주에서 계엄군이 행한 잔혹한 만행의 책임을 직접 계엄군에게 물어야 한다고 결정하여 시민군 대표를 뽑았습니다. 시민군의 대표로 본인(전옥주), 김범태(당시 조선대생), 박강수(현 시사포커스 발행인)씨 등이 선정 되었고, 우리와 계엄군 측 육군 중령, 소위 두 사람과 함께 전남도청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도지사가 모친상을 당해 자리에 없어서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도지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연행된 시민석방, 계엄군 철수, 계엄사령관과의 협상 주선 등이었습니다. 도지사께서는 “지금 나도 상당히 분개에 떨고 있다. 계엄군을 투입할 시에는 사전에 도지사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는데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하며 계엄사령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수소문을 해서 낮12시까지 도지사실에서 우리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받고 나서, 우리는 시민들이 떨고 있으니 광주의 주인인 도지사가 유혈사태에 대해 1차적으로 사과하고 시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해 달라고 요청 하였습니다. 도지사는 “시민들이 분노와 불안에 떨고 있으니 전옥주씨가 먼저 시민들을 안정시켜주면 5분후에 나와 위로의 말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도시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낮 1시가 되자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애국가와 때를 맞춘 듯 “따따따∙∙∙따따따∙∙"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습니다. 이 총성이 퍼지자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계속 방송으로 시민들을 자중시키고 있는 도중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와 저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시민들에게 “광주 시민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광주시장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을 세 번 외치는 도중 우리에게 계엄군의 장갑차가 밀려들어왔습니다. 구용상씨는 저를 구하기 위해 저를 계엄군 쪽으로 밀고, 자신도 피했습니다. 제가 계엄군 쪽으로 넘어지자 계엄군들은 총을 겨누고 저를 에워쌌습니다. 계엄군들은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와 같이 도청에 들어갔다 나온 박강수씨는 군중 앞에 있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다른 계엄군에게 목덜미를 잡혀 군화발로 짓눌리고, 곤봉으로 맞으면서 관광호텔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가두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할 생각 이셨습니까? 장갑차에 위협을 당한 후 더 이상 방송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도청에 같이 들어갔던 중령이 나에게 다가와 마이크를 주워 주면서 “시민들을 자중시켜 주십시오!”라고 방송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그 중령은 “시민들이 아가씨 말 밖에 듣지 않으니까 아가씨가 시민들을 자중시켜 주십시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마이크를 다시 들게 되었습니다. 가두방송 중 시민들에게도 간첩으로 오해를 받으셨다는데? 가두방송을 계속하다가 어떤 이가 저를 간첩으로 선전해 시민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당시에도 간첩이라면 무조건 신고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트럭에 끌려가다가, 저의 집에 가서 부친이 전직 율어 지서장이고 면 의원을 지냈으며, 저도 전혀 의심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 받고 풀려 날 수 있었습니다. 동지들에게 끌려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죠. 풀려 난 이후에도 가두방송을 계속 하였습니다. 광주MBC방화에 대해서 광주MBC가 불에 타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광주MBC는 절대 시위대가 방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광주MBC는 셔터를 내려놓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시위대의 화염병으로 불에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시위대가 철수한 후 펑하는 소리와 함께 1,2,3층에 동시에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공수부대가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는 소문의 진실은? 공수부대가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는 말은 조금 과장된 것이지만, 광주일고 앞에서 유방이 난자된 채 죽어있는 여학생을 직접 보았습니다. 모란꽃으로 불린 사연은? 가두방송을 계속하다가 23일경 기독병원에 시신을 놓고 돌아오는 길에 간첩이라는 모함을 다시 받고 통합병원 내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습니다. 열흘간에 걸쳐 지독한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수사관들은 저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침투한 간첩 ‘모란꽃’으로 조작하였습니다. 당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궂은 날이면 통증에 시달리고, 때때로 하혈, 다리마비증세가 옵니다. 그해 9월 15년형을 선고 받고 1년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였습니다. 광주교도소에서 출감 된 이후에도 5∙6공 시절 기관원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고, 저의 가족들도 수시로 기관에 불려가 동정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가두방송을 하신 점에 대해 후회를 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때 당시 제가 가두방송을 하지 않았더라면 광주시민들의 항쟁 참여가 적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태가 더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 때문에 많은 시민들의 죽음이 줄었을지도 모른다는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5∙18민중항쟁으로 인해 몸이 망가지고 인생을 포기하고 어려운 삶을 산 것에 대해서는 후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로 인해 정신마저 망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는 분통이 터집니다. 전옥주씨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나섰다가, 다시 지배계급으로부터 버림받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5.18민중항쟁의 중심에 섰던 전옥주씨는 우리에게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닫게 해주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전옥주씨는 해마다 5월이 오면 수면은 물론 음식조절을 못해 병원에 실려 가는가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곡된 언론에 의해 오해받고, 선거 때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같이 싸웠던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일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나섰다가, 다시 지배계급으로부터 버림받는 우리 사회의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5∙18민중항쟁은 당시에는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제5공화국 군부독재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부 세력을 심판하였다. 군사정권이라는 무거운 탄압 속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우리의 민초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 자주, 인권, 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속에 자연스럽게 형성시켰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민중'이라는 계층에 비로소 합류할 수 있는 시민 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5∙18민중항쟁의 중심에 섰던 전옥주씨는 우리에게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닫게 해주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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