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 누진제’ 손질, ‘산업용 전기요금’ 정상화 더욱 공론화될 듯

▲ 시민들의 거센 공분을 사고 있는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법원이 내렸다. 하지만 누진제 개편 논의 등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뉴시스
[시사포커스 / 고승은 기자] 올 여름 유례없는 폭염으로 주택에만 적용되는 전기요금 ‘누진제’는 시민들의 거센 공분을 샀다. 수십만원의 전기세 폭탄을 맞은 가구는 수백만이나 되기 때문이다. 예년보다 더욱 추울것으로 예상되는 겨울철에는 가정에서 전기장판이나 전기난로를 쓰다가 살인적인 요금폭탄을 맞는 이들이 많은 만큼, 반드시 겨울 전에는 전면적으로 폐지 혹은 개편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법원은 6일 시민들의 공분과는 달리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8단독 정우석 판사는 이날 주택용 전력 소비자 17명이 한전을 상대로 낸 전기요금 부당이득 반환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2년2개월만에 한전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행 주택용 전기요금은 총 6단계의 누진제로 운용되고 있다. 사용 전력량을 기준으로 최초 100㎾h까지는 1단계, 그 이후부터 100㎾h씩 2~6단계로 나누고 누진요금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전기사용을 많이 할수록 요금단가가 높아지고 가격 차이는 최고 11.7배에 달할 정도라 여름철이나 겨울철에는 어김없이 요금폭탄이 떨어졌다. 이런 누진단계와 누진율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한국만 월등히 높다.
 
소송을 제기한 소비자들은 “주택용 전력 소비자들은 산업용과 똑같은 전기를 쓰고도 최대 11배가 넘는 요금을 내는 셈”이라며 “전기요금 누진제는 부당하다”고 밝혔다. 주택용 전기는 전체 사용량의 13%대에 불과하지만, 산업용은 55%를 차지하고 있다.
 
살인적 ‘누진제’ 때문에 소비자들만 ‘억압적 비소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1인당 가정용 전력 소비량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전기를 싼 값에 물 쓰듯 쓰면서 에너지사용 효율성이나, 에너지산업 경쟁력 등이 크게 떨어졌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 오고 있다.
▲ 전체사용량의 13% 정도에 불과한 가정용에만 살인적인 누진제가 적용된다. 무더위와 추위로 전기를 많이 쓰는 여름철과 겨울철엔‘요금폭탄'이 우려될 수밖에 없다. ⓒ채널A
그러나 재판부는 “지식경제부의 전기요금 산정기준 등에 대한 고시에도 필요할 경우 차등·누진 요금을 내도록 하는 등 누진 체계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주택용 전기요금 약관은 누진체계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해 감액하거나 요금을 달리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누진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누진률이 과도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각 나라의 전기요금 정책은 나라의 상황, 전력수요 등에 따라 다양하게 정해진다”며 소비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인강의 곽상언 변호사는 판결 이후 “근거 규정이 있는 것과 약관이 위법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라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첫 판결된 소송 외에도 누진제 관련 소송은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3건, 광주·부산·대전·대구·인천 등 전국지방법원에서 6건 등 총 9건이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소송 참여 의사를 밝힌 이는 거의 2만명에 달할 정도다.
 
곽상언 변호사는 7일 오전 JTBC와의 인터뷰에서 “(재판부가)매우 회피적인 판결을 했다”며 “실질적인 내용에 대해선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 ‘누진율이 공정한 것인지, 누진체계요금 체계가 공정한 것인지’에 대해선 판결문에 단 한 줄도 없다.”고 재판부를 질타한 뒤 “첫 판결이라서 꼼꼼한 논리와 상세한 검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실망스럽다”고 법원에 강한 유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누진요금 규정은 전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요금규정이다.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며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용량에 따라, 사용의 필요에 따라서만 요금을 내면 된다. 그것이 정당한 것이다. 향후 개편돼야하는 요금체계는 ‘누진율을 완화한다. 누진단계를 줄인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누진요금 체계자체가 폐지되어야 한다”며 누진제 자체의 폐지를 강조했다.
 
◆ ‘살인적 누진제’ 완화 수준 핵심 쟁점
 
소송 결과와는 별도로, 누진제 개편 논의는 내달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전기요금 당정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누진제 개편을 논의 중에 있다. TF는 이달 중 공청회를 열고 내달 중 개편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그러면서 올 겨울부터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조환익 한전 사장은 지난 5일 국정감사에서 '전기요금 누진제를 폐지할 의사가 있냐'는 질의에는 “전기요금 누진제 폐지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답하면서도 “현행 6단계 요금 체계를 낮춰야 한다”고 밝혔다.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국정감사에서 "누진제는 물론 교육용, 산업용 등 용도별 요금체계의 적정성, 형평성에 이르기까지 전기요금 체계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개편방안을 마련하겠다"며 누진제 개편을 시사했다. 산자부는 줄곧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펴며 누진제를 고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해왔는데, 전향적인 입장을 보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핵심 논쟁거리인 누진제 완화 수준에 대해선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미 가정에만 독박을 씌우는 누진제 개편에 대해 완화 방침을 밝히면서, 개편안을 발표했다.
▲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8일 누진제를 현행 6단계에서 3단계로 줄이고, 최고 누진배율을 현행 11.7배에서 2.6배로 대폭 축소하는 방안을 담은 누진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더민주가 지난달 내놓은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방안에 따르면, 누진제를 현행 6단계에서 3단계로 줄이고, 최고 누진배율(최저요금과 최고요금의 차이)도 현행 11.7배에서 2.6배로 대폭 축소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1단계는 기본요금 0원에 ㎾h당 전력량요금 64.8원, 2단계는 기본요금 4000원에 전력량요금 130원, 3단계는 기본요금 8000원에 전력량요금 170원 등이다.
 
현행 최저 단계인 '100kWh 이하'가 60.7원, 최고 단계인 '500kWh 초과'가 709.5원으로 최고 누진배율이 11.7배에 육박하는 것을 대폭 완화한 셈이다. 더민주는 시뮬레이션 결과 150㎾h 사용시 월 4050원, 250㎾h 사용시 월 3340원, 350㎾h 사용시 월 1만7천750원, 450㎾h 사용시 월 3만7천490원의 요금 절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국민의당은 현행 6단계 누진제를 1~2단계(100kW이하, 101~200kW)요금구간을 통합해 1단계 요금을, 3~4단계(201~300kW, 301~400kW)요금구간을 통합해 3단계 요금을 적용하는 등 총 4단계로 줄이는 대안을 제안한 바 있다. 국민의당은 이럴 경우 연간 1조원 가량 전기요금 부담이 줄어들 거라 전망했다.
 
앞서 조경태 새누리당 의원도 지난 8월 전기요금 누진단계를 현행 6단계에서 3단계로, 최고 누진배율을 현 11.7배에서 1.4배로 낮추는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더민주 측에서 내놓은 안보다 더 파격적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폭염이 일던 7~9월 석달간 한시적으로 누진제 6단계 모든 구간의 폭을 50KWh씩 높여 전기요금 부담을 완화한 바 있다. 이를 통해 가구당 평균 수천원의 요금은 할인됐지만, 누진제로 맞는 ‘전기료 폭탄’에 비하면 ‘코끼리 비스킷’ 수준이었다. 이런 개편안을 발표했다간 “장난하냐”라는 원성만 살 수밖에 없다. 당정 TF의 개편안과 야당의 안이 크게 다를 경우 또다시 논쟁이 커질 것이며, 시민들의 ‘누진제 폐지’ 목소리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 ‘사용량 절반 넘는’ 산업용 전기 인상 여부도 쟁점
 
전체 사용량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의 요금 인상 여부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정 TF 위원인 곽대훈 새누리당 의원은 “전력 소비량의 52%를 차지하는 산업용의 사용량이 경부하(전력수요가 많지 않은) 시간대에서 증가하고 있어 전력공급 비용도 상승하고 있다”며 “경부하 시간대 산업용 요금을 인상할 필요가 있다”면서 산업용 전기요금을 일부 인상하자는 뜻을 보였다.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은 "경부하 시간의 발전요금이 싸니까 전부 그 시간에 몰려 LNG까지 쓰고 있다. (개선의) 검토대상이 될 수 있다“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 인상에는 동의하고 있는 셈.
 
야당 측에서는 기업들이 싸게 쓰고 있는 산업용 전기요금을 전반적으로 인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산자부는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산업통상자원부는 그동안 누진제 개편을 노골적으로 반대해왔다. 그러나 최근엔 주형환 장관은 누진제 개편 등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산업용 전기 인상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시사포커스DB
주형환 산자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국감에서 “대기업(산업)용 전기는 배전 비용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주택용보다 쌀 수밖에 없다.”며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많다고 해서 전기요금을 더 내라는 건 논리 비약”이라며 반대했다.
 
만약 산업용 전기 요금이 ‘그대로’ 간다면 형평성 문제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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